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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자기역사

Gimcheon Museum세계도자기박물관

세계도자기역사

도자기의 역사

도자기는 신석기시대에 최초로 토기를 만들었으며 이집트에서는 BC5000년경에 채색토기가 있었고 동양에서는 중국의 채색토기로부터 도자기가 만들어졌다. 도자기는 물레의 사용이 본격화되고 유약이 개발되면서 고온에서 구워내는 방법으로 발달하였다. 한 육조시대에 청자와 천목이 제작되었으며 당·송시대에 동양풍의 독특한 도자기인 청자, 백자, 천목류의 것이 만들어졌다. 또한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기술이 전수되고 유럽에서도 동양의 것과 같은 도자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는데 18C 독일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므로서 동양에 비해 늦게 도자기가 발달되었다.

크리스탈은 페니키아 상인들이 모래밭에서 취사를 하다가 우연히 소다가 모래와 섞여 전혀 새로운 물질인 유리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BC3500년경의 이집트 유물에서 가장 오래된 유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이집트지역에서 유리제조가 행해졌고 13C 이태리 베니스의 무라노섬에서 유리공업이 발달하였다. 크리스탈은 뛰어난 투명도, 아름답고 경쾌한 충격음 등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수정처럼 아름다움이 있어 크리스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제조기법이 유럽전역에 전파되어 수백년간 유럽왕실과 귀족들의 애호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유럽자기의 기원

동서교역의 통로였던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도자기가 유럽에 전파되면서 18세기 초 유럽에서 본격적인 백색자기 문화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유럽에서 자기를 포셀린(Porcelain)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소개했다해서 붙여진 말이며, 도자기를 보통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것도 중국에서 유래됐다는 뜻을 담고 있다.

1709년 독일 마이센에서 처음으로 중국식 경질자기가 제작된 것을 시초로 하여, 유럽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자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왕들이 자기 제조사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당시 백색자기는 금보다 귀한 것으로 간주되어 왕실과 특정 귀족사회에서만이 소유할 수 있는 값진 보물이었다.

초기의 유럽자기에는 동양적인 문화와 철학이 담겨져 있으며, 문양이나 발색기법 등에서 오리엔트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근대에 이르면서 화려한 색상과 금색으로 서구 취향에 부응한 패턴으로 변화 발전되어갔으나 아직도 동양의 맥이 이어져 내려와 유럽자기에서 오리엔트 양식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런던과 뉴욕의 소더비경매와 크리스티경매에 18~20세기의 유럽자기가 경매로 나오고 있고, 그 희소성으로 인해 매우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로열 코펜하겐
로열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덴마크)

흰 바탕에 남색으로 조그만 꽃이나 만초(蔓草)를 기조로 한 문양을 그린 이 가마의 청화백자는 오늘날 세계적인 고급품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마가 문을 연 것은 1727년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자기를 굽지 못했고 1771년 약제사 프란츠 하인리히 뮐러에 의해 겨우 자기를 구울 수 있게 된다. 크리스티안 7세 왕의 왕비인 줄리안 마리의 도움을 받아 1775년 왕실 어용 제도소(製陶所)가 되지만,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1779년 국왕의 재정 원조를 얻어 왕립 덴마크 자기 제조소가 되었다.

이곳에서 만든 ‘플로라 다니카’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덴마크 왕이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보내는 선물로 제작된 이 시리즈는 모두 1,802점으로 12년에 걸쳐 공들여 만들어졌으며 덴마크의 들꽃이 그려졌다. 1868년부터는 민간 경영으로 넘어갔고 1885년에는 아놀드 크로가 디자이너로 입사하여 쉬누아즈리 양식만이 아니라 다른 그림이나 유약으로도 세계를 넓혀 ‘미드서머 나이츠 드림’ 시리즈를 만드는 등, 이 가마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유럽 요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웨지우드
웨지우드(Wedgwood, 영국)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1730년 스태퍼드셔의 버슬렘에서 대대로 도자기 제작에 종사해온 토머스 웨지우드의 열세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죽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게다가 어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오른쪽 발을 잘라낸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가하고 열두 살 때 이미 훌륭하게 물레를 돌리고 스물네 살 때 그곳의 유명한 도공 토머스 휠던에게 초빙되어 그와 동업하게 되었다. 그는 틀림없이 도자기에 관한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759년까지 휠던 밑에서 일을 하며 소금유약(salt glaze) 계통의 흰색 석기(炻器)를 개량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1760년에 독립하여 먼저 ‘크림 칼라 웨어’를 만들어 조지 3세의 왕비인 샤로트에게 바쳤다. 샤로트는 그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거기에 ‘퀸즈 웨어’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허락했다. 뒤이어 1764년에서 1766년 사이에 ‘블랙 바살트(검은 현무암)’ 또는 ‘이집티안 바라크(이집트의 검정)’라고 불리는 현무암처럼 단단한 석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773년에는 ‘왁스 비스킷’이라고 불리는 밀랍처럼 매끄러운 흰색 석기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명한 ‘재스퍼 웨어’를 만들었다. 그것은 거의 자기에 가까운 반투명의 흰색이지만 코발트나 다른 안료를 써서 여러가지 색의 바탕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 흰색 카메오 세공과 같은 첩화(貼花) 장식이 덧붙여졌다. 특히 그는 고전에 깊은 관심을 가져서 1790년에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포틀랜드 꽃병이라는 유리 항아리를 재스퍼 웨어로 복원하여 높이 평가받았다.

웨지우드는 그 정도의 기술을 가진 가마이며, 지금도 영국풍의 고아한 본 차이나와 영국다운 기형과 문양의 자기를 생산해서 도자기 공장으로는 영국 최고의 명문이다.

지노리
지노리(Ginori, 이탈리아)

1735년 카를로 지노리 후작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애호되고 있던 로코코 양식에 반발하여 신고전주의를 주창하며 지노리 가마를 열었다. 이 가마의 제품은 특히 인페로라고 불리는 띠 문양을 변화시키고 있다. 근래에 ‘파보네’, ‘인타르시오’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개발하여 캐주얼한 물건을 만드는 데도 힘을 기울이는 것이 이 가마의 새로운 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년 전 이 가마에서는 설립 250주년을 기념하여 ‘그랑듀카’라는 이름을 붙인 세트, 디너 플레이트, 수프 플레이트, 티포트, 찻잔과 받침접시, 슈가 포트, 크리머 등 일찍이 1745년에 로렌초 지노리 후작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바쳤던 헌정품을 다시 만들어 구웠다.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쉬누아즈리를 반영하고 있지만 이탈리아풍의 밝음과 세련됨을 지녔다. 또한 역시 이탈리아는 조각이 발달한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만들어진 옅은 색조의 인물 시리즈는 그 귀여운 표정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있으며 여행할 때마다 한 개씩 소장품을 늘리는 애호가도 있다.

로열 크라운 더비
로열 크라운 더비(Royal Crown Derby, 영국)

1890년에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왕실용품을 대는 어용가마로 지정되어 로열과 크라운이라는 이름을 쓰는 가마가 되었다. 이 가마는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 이마리 도자기의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저팬’이라는 이름의 시리즈를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만들고 있다.

일본의 이마리 도자기가 유럽에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기였다. 당시는 가키에몬 양식의 디자인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이 가마가 열린 1775년경에는 이마리에서 청화 비단자기의 시대도 끝나고 헌상비단자기라고 통칭되는, 나베시마 번이 사용하거나 번주(藩主)가 다른 번주에게 선물하곤 했던 아주 화려하고 금채를 듬뿍 사용한 것이 구워졌다. 그리하여 그것이 영국 더비 가마 디자인의 기조가 되었는데, 진한 남색이나 적색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금채를 넣은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헌상자기 양식이 이미 디자인적으로 세련되어 정착되어서 일본적이라기보다 더비 가마다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열 우스터
로열 우스터(Royal Worcester, 영국)

이 가마는 1751년 우스터 시내의 웜 가에서, 존 월이 이끄는 영국 자기가마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1776년 월이 죽자 경영체계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만 1788년 조지 3세가 이 가마를 방문한 것을 기회로 ‘로열 우스터 포슬린 웨어’라는 명칭의 사용을 허가받았다. 그 후 1862년에 한때 퇴사했던 노련한 도공 로버트와 험프리 체임벌린 등을 불러들여 그 후 현재까지 존속하는 ‘우스터 로열 포슬린 컴퍼니’의 기초를 굳혔다.

제품으로는 처음에 쉬누아즈리를 디자인의 중심으로 삼고 중국이나 일본 이마리 도자기 등을 취급했지만 로버트 핸콕이 동판전사를 도입하고 또 마지막 유약을 바르기 전에 색채를 칠하는 등 다른 가마보다 한 걸음 앞선 기법을 연구했고 첼시 가마나 보 가마에서 도공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곳의 생산품은 여러 종에 이르게 되었고 영국의 대표적인 가마의 하나가 되었다.

스포드
스포드(Spode, 영국)

조사이어 스포드가 1770년에 만든 가마다. 그는 문양을 유약 밑에 넣는 것에 관해 여러 가지 개량을 시도하여 업적을 쌓아 갔다. 1797년에 이 가마에서도 본 차이나를 굽기 시작했는데 원래 본 차이나는 보 가마에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 요업에서는 항상 기술을 비밀로 했고 또 그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서로 도공을 빼돌리기도 했는데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단지 보 가마보다 나중에 출발한 스포드 가마의 본 차이나가 투명성이 더 좋았던 듯 1806년에는 뒷날의 조지 4세에 의해 영국 황실용품을 대는 어용가마가 되었다. 이 가마는 한편으로 영국의 기형과 문양의 전통을 지켜나가면서 지금은 독창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도 노력하고 있다.

콜포트
콜포트(Coalport, 영국)

이 가마는 1790년 존 로즈가 웨일스 지방 슈롭셔의 쟈크필드에 만들었던 가마를 폐쇄하고 콜포트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존 로즈는 상당한 사업가였던지 1799년에 카플레 가마, 1820년에 난트가우 가마와 스온지 가마를 사들여 합병하는 등 차례차례로 가마를 옮기고 합병했다. 당시 무연장석질(無鉛長石質) 유약을 발명하고 프랑스 세브르계의 다채 식물무늬를 넣은 물건을 생산하였는데 그 질이 좋고 궁정에서도 사랑을 받았으므로 왕립미술협회에서 금패를 받았다.

이 가마는 지금도 영국을 대표하는 가마로서 디너세트, 디너포트, 컵과 받침접시 등을 만들며 일본에도 그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노리다케
노리다케(Noritake, 일본)

1904년 나고야의 노리다케(則武)라는 곳에 설립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기 회사다. 1914년에 일본 최초의 디너세트가 여기에서 구워졌다. 순백색의 크고 평평한 접시를 굽는다는 것은 당시 일본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양식기는 일본제든 외국제든 별로 다르지 않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노리다케라는 것은 양식기의 대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 1910년대 이후에 이미 시장을 해외로 넓히려고 유럽이나 미국에 직원을 보내 시장조사를 하였다. 따라서 이 회사의 기본적인 자세는 서구지향적이다. 본사 건물 맨 위층에 자리잡은 노리다케 박물관에는 창업 이래의 역사를 말해주는 제품들이 진열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앤슬리
앤슬리(Aynsley, 영국)

앤슬리는 영국인이 만든 영국적인 포셀린으로 비교적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스탠퍼드셔에서 탄광을 운영하던 도자기 마니아 앤슬리가 1775년에 가마를 걸고 흙을 빚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도자기 사업에 승부수를 던지게 된 것인데, 그는 이미 취미로 도자기를 구울 만큼 도자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스탠퍼드셔는 재료인 흙이 좋고 석탄까지 나오기 때문에 도자기 가마를 운영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수입품 도자기를 보고 감탄한 존 앤슬리는 1784년경부터 ‘최상의 것을 최상의 사람들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우수한 도공들을 양성하면서 저 멀리 바다 건너 동아시아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영국의 귀족들이 흡족할 만한 제품들을 생산해냈다.

본 차이나 생산에 돌입한 앤슬리의 제품은 본바탕에 빛깔을 가미해 수준 높은 장식을 하였다. 한 수집가의 노력으로 현재 로열 앨버트 박물관에 여러 종류의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마이센
마이센(Meissen, 독일)

유럽에서 최초로 순백의 도자기 제조에 성공한 마이센은 초기 유럽의 도자기 산업을 이끌었다. ‘청화양파문자기-Blue Onion’은 초기 중국 도자 무역으로 수입된 도자기 중 도교사상의 문양이 양파로 오인되면서 유럽에 정착한 아름다운 도자기이다. 현재까지 생산이 되고 있는 제품으로, 상업논리가 난무한 현대 산업에 역사라는 보기 좋은 마케팅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제품이다.

야드로
야드로 (Lladro, 스페인)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한 농가에서 야드로 3형제는 도자기 인형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야드로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1960년 상반기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야드로 브랜드는 1969년에 이미 1,500명 이상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적 유명회사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현재는 발렌시아 지역에 “The Town of Porcelain"로 불릴 정도로 거대한 종합 도자기 공장을 설립하였다. 스페인 조각예술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전원도시 발렌시아의 야드로 공장은 그 명성이 자자하다. 섬세한 작품 제작 솜씨의 극치를 이루는 “꽃” 소품들이며 파스텔톤 색조가 우아한 도자기 인형 작품들은 전 세계 수집가들의 애장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장가치를 더해가고 있다.

레녹스
레녹스(Lenox, 미국)

레녹스의 세라믹 아트 회사는 1889년에 문을 연다. 처음부터 레녹스의 스타일은 다른 자기들과는 차별성을 두었다. 조직면에서도 공장보다는 아트스튜디오를 먼저 세워 단순한 제품이 아닌 상아빛의 광택 나는 아트웨어를 선보였다. 창업자인 월터 스콧 레녹스는 질적인 아름다운 테이블 웨어, 기프트웨어(특히 인형)로서의 명성과 기대를 받고 있다.

세브르
세브르(Sevres, 프랑스)

1740년에 프랑스의 뱅센(Vincennes)에 문을 연 도자기 공장은 독일의 마이센만큼 뛰어난 자기를 개발하기 위해 루이 15세의 지원 아래 공장을 세브르로 옮겨 본격적인 중국식 경질자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도기에 주석을 함유한 연질도기 파이앙스는 프랑스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어온 도자기였으나 리모주 부근에서 고령토층을 발견하면서 백색 자기 개발이 급진전되었다.

세브르 특유의 화려함은 로코코양식의 정수이기도 하며, 세브르는 바탕색으로 특징을 나타냈는데 일명 ‘세브르의 청색’으로 불리는 청금색의 독자적인 색채처리가 뛰어나다.

카포디몬테
카포디몬테(Capodimonte, 이탈리아)

1743년 나폴리 왕 부르봉가의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 북부 교외에 만든 왕실 집기용 가마다. 왕비인 마리아 아말리아는 마이센 가마의 창시자 아우구스트 2세의 왕녀이기도 해서 자기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는 것이 여기에 반영되고 있다. 거기에는 마이센 도공의 원조 등도 있어서, 마이센 도자기와 상당히 비슷한 것이 궁정용품으로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만들어졌다.

일년에 한 번 성자(聖者) 카를로스의 축일에 희망자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왕궁에서 사용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박물관이라든지 몇몇 한정된 수집가들에게 소장되어 있다. 16년 후에 이 가마는 폐쇄되었다. 그것은 카를로스 3세가 이복형인 스페인 왕 페르난도 6세가 죽자 스페인 왕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1759년에 유능한 도공 수십 명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가서 1769년 부엔레티로 궁전에 새 가마를 만들고 1808년까지 도자기를 구웠다.

이 가마는 유명하긴 하지만 독일에서 도공을 부르거나 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이센이나 빈풍의 물건을 주로 만들었고 이탈리아다움이나 스페인다움을 결여한 도자기를 구웠다고 할 수 있다.

로열 덜튼
로열 덜튼(Royal Doulton, 영국)

영국다운 맛을 가진 가마로 유명하다. 소금유약에 의한 스톤웨어계의 연질자기 생산에 철저했던 것이 이 가마의 특징이다. 지금의 영국 국회의사당을 사이에 두고 템스 강 건너편이 램베스 지구이다. 이곳에는 일찍이 소금유약 그릇을 만드는 가마가 70군데나 있었다. 그중 하나로 1815년 당시 물레의 명인으로 일컬어지던 존 돌턴이 보크솔오크에 연 것이 이 가마다.

그리고 존 와츠의 협력을 얻어 ‘돌턴 앤 와츠’라는 이름을 짓고 8년 후 공장을 램베스의 하이스트리트로 옮겼다. 이 가마는 1854년에서 1861년 사이에 몇차례에 걸쳐 잇달아 생산 기술에 관한 특허를 얻었다. 또 1851년에서 1872년 사이의 20년 동안 빈, 파리,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영국 내에서도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매우 참신한 디자인과 그 아름다움으로 알려져 있지만 처음에는 고전적인 식기를 만들었다. 그후 식기 생산을 중단하고 대형 화학 및 위생용품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오늘날 이 가마의 새로움으로 통하고 있다.

민턴
민턴(Minton, 영국)

윌로 패턴(willow pattern)의 동판전사(銅版轉寫)로 유명한 토머스 민턴이 1796년 리버풀에 만든 가마다. 이 가마는 전사 특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많은 가마에서 짐마차 가득 도자기를 싣고 프린트를 하기 위해 줄지어 왔으므로 아주 융성했다. 1836년에 토마스 민턴이 죽자 아들인 허버트는 존 보일트를 동업자로 맞아들였고 그가 은퇴하자 마이클 호린스와 손을 잡지만 가마의 명칭은 민턴 앤 컴퍼니 그대로였다.

1849년에 콜린 민턴 켐벨을 경영진으로 맞아들여 세 사람이 경영했는데 1858년 허버트 민턴이 죽자 가마 이름이 호린스 앤 켐벨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윌로 패턴만이 아니라 더비 가마의 도예가 스틸 뱅크로프트, 핸콕, 그리고 프랑스 조각가 카리에 베르즈, 마르크 루이 솔롱 등을 다른 가마에서 차례차례 초빙하여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했던 데서 이 가마의 전향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