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봉산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봉산면

역사적 인물

문장공 매계 조위(文莊公 梅溪 曺偉)선생
이륜행실도를 편찬한 적암 조신(曺伸)

울진현령 조계문(曺繼門)의 아들이자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의 동생으로 자(字)는 숙분(叔奮)이요 호는 적암(適庵)이며 시호(諡號)는 효강공(孝康公)이다. 두 형제가 나란히 시호(諡號)를 받고 학문과 덕행이 형 매계 조위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 조선조 김천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각별하여 형 매계를 그림자처럼 따랐고 매계가 가는 곳에 늘 적암이 있었으며 두형제 모두 성종(成宗)의 총애를 받았다. 외국어에 특히 뛰어나 명나라에 7차례, 일본에 3차례나 사신으로 다녀왔고 안남국 사신과 시를 주고받아 문학으로 국위를 널리 떨쳤으며 일본에 통신사 신숙주(申叔舟)를 수행하여 시(詩)로서 일본인을 놀라게 하였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은 선생에게 시(詩)를 지어 주었는데 "신(伸)은 풍월객이요 시명(詩名) 또한 뛰어나도다, 홀로 능히 고율(古律)을 겸할수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구슬이 아니랴(이하생략)"하고 칭찬하였으니 선생의 면모를 짐작할수 있다.
성종의 부름을 받아 어전시제에 참가하여 강운시제(强韻詩製)가 매우 아름답고 훌륭하여 특명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받았으며 예문관공봉, 대군사부(大君師傅), 내의원정(內醫院正), 사역원정(司譯院正)등을 지내고 증직(贈職)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내려졌다. 중종의 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여 뒷날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완성의 대본을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적암시고(適庵詩稿)」, 「수문쇄록」,「백년록(百年錄)」등이 있으며 「직지사운」을 비롯한 많은 시를 남겼고 봉산면 봉계 율수재(聿修齋)앞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 신도비(神道碑)옆에 적암 조신(曺伸)의 신도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때 순국한 조천민(曺天民) 부자(父子)

조천민은 고양군수를 지낸 조 척(曺 倜)의 손자로 봉계에서 태어났으며 천성이 근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임진왜란때 아들 조 함(曺 涵)과 함께 봉계에 들어닥친 왜적과 싸워 많은 적을 죽이고 부자(父子)가 함께 순국 전사하였으며 집의 종기산(家奴 起山)이 부자순국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주인 부자(父子)가 이지경을 당했는데 나홀로 어찌 살리오"하고 왜적에게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한 가정에서 충효인이 나니 모든 사람들이 「충효인 삼절(三節)」이라 칭하였다. 조정에서 조천민 부자에게 정려(旌閭)와 복호를 내리고 종기산에게도 정려를 내렸다.

4학문4효자의 아들 길러낸 조 유(曺 逾)

매계 조위선생의 5대손이자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 조제창(曺悌昌)의 아들로 1649년 (인조27년)에 봉계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자고(子高)요 호는 우졸당(遇拙堂)이다. 학문과 덕행이 고고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유림의 상소로 1778년(정조2년)에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4형제가 모두 학문이 고상하고 효성이 높았으며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여 사림(士林)에서 추앙(推仰)하였고 4형제가 거처하는 마을을 "조효자동(曺孝子洞)"이라 일컬었다 한다.
아버지와 아들 4형제가 문정공 우암 송시열선생의 학맥(學脈) 을 이은 좌의정 문순공 수암 권상하(文純公 遂菴 權尙夏) 문하생으로 큰아들인 조세호(曺世虎)는 자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둘째 아들 조세룡(曺世龍)은 지평(持平)이 증직되었으며, 셋째 아들인 조세봉(曺世鳳)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이 증직되었고, 넷째 아들인 조세붕(曺世鵬)은 성리학을 탐구하여 학문이 대성하고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며 1725년(영조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이 제수되었다.
우졸당 조유의 아들 4형제를 일컬어 "창녕조씨 4효4학행(昌寧曺氏 四孝四學行)"이라 하였고, 아들 4형제가 한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이들 4형제가 거처하는 마을을 일컬어 "조효자동(曺孝子洞)"이라 칭하였다.

관찰사 조 시 영(曺 始 永)

1843년(헌종9년)에 문장공 매계 조위(曺偉)선생의 12대손이자 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조진구(曺鎭九)의 아들로 봉산면 봉계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치극(致克)이요 호는 후계(後溪)이다.
1882년(고종1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 소모사(召募使)로 임명되어 동학군을 완전 진압하였고 진압의 공으로 「갑오공신록」에 올랐으며 주요벼슬로는 홍문관 부수찬, 교리, 응교, 지평, 병조정랑, 병조참의, 형조참의, 동부승지, 흥양부사, 고령부사, 여산부사, 경상도소모사, 경상남도관찰사등을 지냈다.
3개군에 부사로 재직시 선치(善治)로 송덕비(頌德碑)가 각각 세워졌고 경상남도관찰사 재직시 많은 치적(治績)과 선정(善政)으로 진주에 사당(祠堂)과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세워졌으며 합천해인사에는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져있고 경상남도 진주에 세워진「觀察使曺公始永 淸德善政碑(관찰사조공시영청덕선정비)」의 비문내용은 아래와 같다.
「 鳳凰于飛 于我汾城. 玉壺 精鑑 無遠不明. 似春斯暖 如水之淸. 峨峨矗石 與屹治聲. 」
(해석문 : 그대는 새중의 봉황새, 인연있어 진주(晋州)에 날았습니다. 옥같이 티없는 밝은 거울, 어느곳하나 비추지 않음이 없었소.
온정은 부모의 품속 봄과도 같은 것, 청렴은 물처름 맑아 만대(萬代)가 본보기. 위엄있고 성(盛)한 모양 矗石(촉석)을 닮았으니, 어진 정치들난 이름 산(山)과 함께 견주내.)
저서로는 「상례제요(喪禮提要)」, 「후계집(後溪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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