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부항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부항면

지명유래

부항면은 지례현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면이라 했는데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상서면, 하서면으로 분할했다. 상서면은 단산·사동·구룡·학동·어전·부항·지시·서장· 상대·하대·해인·대야 등 13개 동이며, 하서면은 죽전·파천·임곡·안간·대평·두산 (갈계)·말미·교현·외희·죽동·용촌·유촌·동산·가물·상지·하지·옥소·신소·신촌 등 21개 동리를 관할했다.

1914년에는 군면의 통합에 따라 상서·하서 두 면을 합하여 부항면이라 하고 관내 34동을 사등·월곡·어전·하대·해인·대야·파천·안간·두산·희곡·유촌·지좌·신옥의 13동으로 개편했다.

부항면 사무소는 유촌리에 있었는데 1959년 말에 사등리 516-2번지로 이전하자 전 하서면 측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1960년 7월 12일에 유촌리 505-10번지에 출장소를 설치했다가 1998년에 폐쇄했다. 1963년에는 13개 법정 리동을 19개 행정동리로 분할했다.

김천시 남쪽 서편에 위치한 부항면은 시청에서 32km 떨어지고 면의 서쪽은 삼도봉을 중심으로 북은 황악산, 남으로는 대덕산이 이어지는 준령으로 대체로 지대가 높고 동쪽으로는 평평한 지대이다. 서쪽으로는 어전·해인·대야·안간의 여러 골짜기 물이 동으로 흘러 동쪽 끝에서 합류하면서 논이며 작은 들을 이루는 바 기름지다. 부항천의 수위는 변함이 적고 차가워서 모내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이루어진다.

김천의 남서부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지례면, 남으로는 대덕면, 북으로는 구성면과 접하고, 서로는 삼도봉을 기점으로 삼도가 접하는데, 북은 충청북도 영동군, 남은 전라북도 무주군, 동은 경상북도 김천시이다.

신옥리

본래 지례현에 속한 옥소 신소인데 1895년에 하서면 관하가 되고 1914년에 이를 통합하여 신소의 신자와 옥소의 옥자를 따서 신옥리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부항면 동쪽끝 면의 입구에 있고 면소재지에서 동으로 6.2km 떨어진 들에 있는 두마을- 옥소, 밤소 마을이다. 밤소는 부항천을 앞에 두고 옥소는 부항천에서 남으로 넓은 들을 지나 골짜기에 있다. 서쪽은 지좌리 북쪽은 유촌리와 접하고 동쪽은 지례면 도곡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밤나무골(栗谷)·밤소·밤시·신소(新梳)
    • 마을 뒷산의 지형이 밤에 보면 옥녀가 머리를 빗는 형이라 하여 밤소라 하였는데, 이 마을은 옥소동 구릉 건너편에 새로 생겼는데 옥소동이라 하여 신소동이라고도 하게 되었으며, 또 예로부터 밤나무 숲이 무성하여 밤나무 골이라고도 불러 왔다.
  • 옥소(玉梳)·옥소동·범박골
    • 뒷산에 있는 옥소처럼 생긴 산봉우리의 모양에 의해서 옥소동이라 했다고 한다. 또 마을 뒷산 입구에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하여 범박골이라고도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유촌리

원래 지례현 서면에 속한 용촌·동산·가물동이었는데 1895년 하서면에 속했고, 1914년 3개 동과 유촌·죽동을 통합하여 유촌리라 칭하였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용촌·동산·가물을 유촌 1리로 분동했다. 동산은 부항면이 된 이래 면소재지였는데 1959년 사등 2리로 이전하고 하서면 주민의 격렬한 반대로 인하여 유촌출장소가 1960년 7월 12일에 설치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부항 간선도로를 따라 5km 떨어진 곳으로 용촌·동산·가물 마을로 이루어진다.

면내에서는 가장 넓은 들은 오초평이고, 들 가운데 부항천이 동류한다. 동남쪽으로는 신옥리, 서쪽으로는 지좌리, 남쪽으로는 유촌 2리, 북쪽으로는 주산인 비룡산(495m)이 마을을 접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용촌(龍村)
    • 동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 동네 뒤에 비룡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용촌이라 하였다 한다.
  • 가물(佳勿)
    • 부항면 유촌 1리 가물 마을은 "월영배회 가물유창(月影俳徊 佳勿流暢)"이란 옛 시구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여기 가물은 거물과 같은 형태로 보이며 모두가 거북 신앙에서 비롯한 것이다.
  • 버드내·유천(柳川)
    • 옛날 이 마을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어느 선비가 천유정을 지었다 하며, 버드나무가 많은 냇가란 뜻에서 버드내·유천이라 하였다.
  • 삭골·삭곡(朔谷)
    • 재산이 많은 외로운 노파가 있어 임종시 자기 소유의 전재산을 동리에 희사하고 매삭에 봉제사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삭일에 제사한 곳이라 해서 삭골·삭곡이라 하였다 한다.
  • 새터·신기·앵서(鶯棲)
    • 새터는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연유된 동명이며, 또 앵서란 마을 이름이 있는데, 이는 이곳에 꾀꼬리가 많이 살았다는 데서 연유된 동명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지좌리

본래는 지례현 서면에 속한 지자골-상지리·하지리였는데, 1895년에 나누어 하서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다시 합하여 지좌리로 되어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조선 초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한 이존인의 후예가 부항면 학문의 대들보 구실을 했다. 그 후 12문중이 계를 조직하여 정자를 지었으며, 그 정자이름이 한송정인데 그곳에서 학문을 논하였다. 그 후 한송정은 병자년 수해로 유실되고,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정자로 인하여 마을 이름을 한송정(寒松停)이라 하였으며, 효자 이영보로 인해 효자촌으로도 불리었다.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5.5km 떨어진 도로에서 남으로 넓은 평야를 지나서 있는 큰 마을이며 농경지들 가운데 부항천이 흐르고 토지가 비옥하다. 마을 동쪽으로는 신옥리, 서로는 사등리, 북으로는 유촌리, 남으로는 큰 산이 막아서서 대덕면 조룡리와의 경계를 이룬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한송정·지좌·지좌리(智佐里)
    • 고려 공민왕 때 전서공 존인은 고려 말의 72현중의 한 사람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삼도봉의 명승지인 구남천에 살면서 여생을 보내고, 그 아들 덕경은 한송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이 마을에 살았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어 이 마을을 한송정이라 했다 한다.
    • 한송정은 현재 지좌리의 옛 이름이다. 구차정은 지좌리에 있는 정자인데, 이 정자는 광해군 때 경암 선생이 한송정 앞에 세웠으나, 병자년 홍수로 매몰되고 그 후 다시 정자를 지어 매년 3월이면 16현에 대한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사등리

본디는 지례현 서면에 속한 단산리였다. 1895년에 상서면·하서면이 합해서 상서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사등리로 되었다. 1963년 단산 웃갯절·아랫갯절 마을을 사등 1리로 나누었다.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3km 떨어진 산간오지에 있는 웃단산·아랫단산 두 마을 사이는 2km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남쪽은 대덕면 조룡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사등2리인 면 소재지, 동으로는 지좌리, 서로는 산악지대를 넘으면 어전 1리에 이웃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웃갯절·상개사(上介寺)
    • 옛날 개사란 절이 있어서 그 절 주위에 있는 마을을 갯절이라 하였는데, 그 갯절마을보다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웃갯절·상개사라 하였다.
  • 사드래·사등(沙等)·사월·사천·사호
    • 이 마을 앞에 시내가 흐르고 있어 냇가의 모래에서 사(沙)자를 따고 이 마을 뒷산이 반월산이어서 월(月)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사드래·사월이라 했다 하며, 사등은 신라시대 사등부곡(沙等部曲)의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지금도 행정 동명으로 쓰인다. 배정소(裵鄭所)는 옛날 배씨와 정씨들이 이 주변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곳으로 하천 양편에 암석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폭포가 흐르고 있고 반석 위에는 수십명이 둘러 앉아 놀 수 있는 곳으로 지금도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 월파재는 사등에 있는 연안이씨의 서당으로 이 곳 주민들이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일어를 가르치는 학교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연안이씨의 재실겸 사월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 장자동(長子洞)·장자골
    • 옛날에 백만장자가 이곳에 살았다 하여 장자동이라고 하였고, 특산물로서는 호두와 감인데 특히 이 곳의 감은 씨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 한적동(閑寂洞)
    • 이 마을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고요했었는데, 어느 때 한 선녀가 이 마을 뒷산에 있는 영천(靈泉)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간 뒤에 동리 사람들은 마을이 정말 한적하다하여 한적동이라 하였다 한다. 이곳에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기와장이나 문고리 여러개가 녹아 뭉치로 되어있는 것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로 봐서 통일 신라시대의 사찰로 조선 중엽에 불에 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1995년에 칠불사를 신축하였으며 호국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월곡리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월이곡부곡(月伊谷部曲)이었는데 말기는 지례현 서면 소관인 월곡·구룡·학동·몽구동으로 1895년에 나누어져 상서면에 소속되고, 1914년에 3개의 마을을 통합하여 월곡리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월곡 서북쪽에 있던 구룡동은 1936년 병자 수해로 유실되고 없어졌다.

현재는 농경지 하천이다.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좁은 들에 있는 월곡-달이실 ·학동·몽구동이다. 학동은 남쪽으로 어전 2리로 가는 길 옆이며, 몽구동은 서쪽 깊은 골짜기에 있다. 동으로 사등리, 남으로는 넓은 골짜기로 어전 1·2리로 이어지고, 서쪽은 하대리, 북쪽은 산이 막아 두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월곡·달애실·다리실·월곡리(月谷里)
    • 본래 지례군 상서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모습이 금두꺼비가 달을 바라보는 것 같다하여 월곡 ·달애실·다리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월(月)-혹은 달-계의 지명은 대부분 높은 곳 혹은 새롭게 개척한 곳을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 학동(鶴洞)·샛골
    • 1000여년 전 풍수설에 능한 어느 지관이 이 마을을 보고 학의 혈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학동, 속명으로는 샛골이라 불리어 지고 있다.
  • 몽구동(夢龜洞)
    • 월곡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어떤 사람이 꿈 속에 큰 거북이를 보고 잠에서 깨어 거북이가 나타난 이 마을에 찾아와 보니 꿈 속에서 본 그 곳에 거북이 실제로 있었다 하여 이 마을을 몽구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어전리

본래는 지례현 서면에 속한 어전리였다. 1895년에 나누어져 상서면에 속하였고, 1914년에 부항리에 통합되어 어전리라 칭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어전리를 어전 1리로 나누었다. 부항면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면 소재지에서 4.1km 떨어진 산간오지에 있는 단일 마을이다. 서쪽은 삼도봉과 전라북도 대덕산의 중간에 부항령-가목재가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준령을 넘어 대덕면에 접하고 동북쪽은 월곡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어전(漁田)·어전리·어전골
    • 임진왜란때 허인이라는 선비가 이곳에 피난와서 보니 들판의 형상이 마치 물고기처럼 생겼다 하여 어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 마을 이름이 없을 때 어떤 도인이 이 마을에 와서 보니 동네 서쪽의 작은 폭포수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어 어전이란 마을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어전재·어전령은 어전리 서쪽에 있는 고개로 경상북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삼국시대에 신라군과 백제군이 싸웠던 재라 한다.
  • 가목·가매실·부항(釜項)
    • 마을이 위치한 곳의 형상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하다가 지금은 한자로 부항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가목이라 하는데, 이는 가매목에서 중간의 매자를 버리고 가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 가목재에서 감내의 큰 줄기샘이 발원한다. 마을이름의 기원으로는 가마-가미-거무(거미)-거북의 의미 상통함으로써 농경사회에서의 숭배대상인 거북 신앙 곧 물신앙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마을에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삼도봉터널(391m : 경북 151m, 전북 240m)이 개통되어 인근의 삼도봉과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하대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서면에 속한 지시리·서장리였다. 1895년에 나누어져 하서면에 예속되었다가 1914년에 이들과 주평·음지촌·양지촌을 통합하여 하대리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면 소재지-사등리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양지에 자리한 하두대·주평·지시·양지촌·음지촌 마을로 이루어진다. 서북으로는 파천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삼도봉의 지맥이 길게 자리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뱃들·주평(舟坪)
    • 이 마을 양편으로 두 개의 개울물이 흐르고 그 개울물 사이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어 그 모습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하여 뱃들·주평이라 하였다 한다. 석문은 뱃들 마을 입구에 마치 문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갈라진 바위 조각 흔적만 있는 것이다.
  • 진시·진실·지시(只是)
    • 300여년 전에 살기 좋은 터라는 말에 따라 화순최씨가 이곳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살다보니 그 말이 옳다하여 진시라 하였다 한다.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는 부락 뒤에 있는 진등날이라는 고개 밑에 있다 하여 진등날의 진자와 마을이란 뜻의 실자를 따서 진실이 되었다가 지시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 박다래산·당산·단산은 지시 남쪽에 있는 산으로 박달나무가 많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하며, 또 예로부터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 중 깨끗한 사람을 뽑아 산신에게 마을의 평안을 빌던 산이라 하여 당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 우리말에서 길다(長)를 질다로 소리를 내는 일이 종종 있는데 여기 진시 혹은 진시도 길게 생긴 골짜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 아랫두대·하두대(下斗垈)·하대
    • 이 마을의 지형이 말의 형상이라 하여 두대(斗垈)라 하였는데, 해인리의 두대와 구별하기 위하여 아랫두대라 하였다 하며 하대는 하두대의 양끝자를 취하여 쓴 이름이라 한다.
  • 조산동·조산마·서장촌(西匠村)·장촌
    • 옛날 장인들이 이룬 마을이라 하여 서장촌·장인촌으로 불러 왔으나 이성출이라는 사람이 마을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조산동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80년대까지도 고리·키·채 등을 만들어 왔다.
  • 음달마·음지말·음지마·음지촌(陰地村)
    • 1700년경 오치성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 마을이 응달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응달마·음지마·음지말·음지촌이라 하였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해인리

본디 지례현 서면에 속한 해인리·상두대였는데, 1895년에 갈라진 상서면에 귀속되고, 1914 년에 두 마을을 통합하여 해인리라 칭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면소재지에서 5.5km 지점 인 서쪽 끝 산간오지에 위치한 상두대·해인동 마을로 삼도봉 아래에 있다. 삼도봉은 경북 ·충북 ·전북의 경계점으로 두 마을간 거리는 약 2km, 북쪽은 대야리, 동쪽은 파천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웃두대·상두대(상두대)
    • 마을 뒷산의 지형이 밤에 보면 옥녀가 머리를 빗는 형이라 하여 밤소라 하였는데, 이 마을은 옥소동 구릉 건너편에 새로 생겼는데 옥소동이라 하여 신소동이라고도 하게 되었으며, 또 예로부터 밤나무 숲이 무성하여 밤나무 골이라고도 불러 왔다.
  • 해인동·해인리(海印里)
    • 신라시대에는 삼도봉 아래 해인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해인리라 하였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야리

본디 지례현 서면에 속한 임곡이었는데, 1895년에 상하로 나누면서 하서면에 귀속되었고, 1914년에 하서면의 임곡 일부 신기와 상서면의 대지를 통합하여 대야리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임곡을 대야 1리로 분동했으며 홍심동은 없어졌다.

면 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부항면 서남쪽 산간지대에 있는 갈평으로 비교적 넓은 지역이며, 남쪽으로는 하대리, 서쪽으로는 해인리, 동쪽으로는 파천리, 북쪽으로는 대야 2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갈불·갈평(葛坪)
    • 이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이곳엔 칡덩굴이 많았다 하여 갈평이라 하였으며, 조선 말엽에 김녕김씨·화순최씨 등이 동리를 개척하였다 하며, 현재 대야리의 중심 마을이다.
  • 대야동·대야리(大也里)
    • 원래의 지명은 천지동(天地洞)이었는데, 신라 경순왕은 서민들이 사는 동리가 천지동이라 함은 부당하다 하여 지명을 고치게 하여 天자에서 一자를 떼어 '大', 地자에 土자를 떼어 '也'로 하여 대야로 개칭하였다 한다. 또 다른 유래에 의하면, 이 마을 주위는 큰 산이 둘러 있어서 지형이 대야처럼 생겼다 하여서 대야동·대야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아래 에 5백년 이상 묵은 전나무가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파천리

원래는 지례현 서면에 속한 춘천리였다. 1895년에 면이 상서·하서로 나누어져 하서면에 귀속되고, 1914년에 죽정전·임곡과 통합하여 파천리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에 춘천을 파천 1리로 나누었다. 파천 1리는 부항면 중심 지대에 있고,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 6.5km 떨어진 야산지에 있다. 마을 앞 부항천은 물이 맑고 괴암이 많아 경관이 좋다. 파천은 사천(巳川)과 같은 뜻인데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모양을 이른 것이다.

동은 두산리, 남은 하대리, 서는 대야리, 북쪽은 높은 산이 막아서서 안간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산 아래 큰 연못이 있다. 현재 가마골은 온천지대로 개발 중에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봄내·춘천(春川)·파천리(巴川里)
    • 세심대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그 옆에 우거진 숲이 아름다워서 봄철에 놀기가 아주 좋았다 하여 춘천이라 하였다. 또한 마을이 남향으로 봄철의 냇물과 같이 맑고 온난하다 하여 춘천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 세심대(세심대)는 봄내 마을 위쪽에 있는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넓고 깨끗한 반석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은 세속에 물든 만인의 마음을 씻어줄 만하다 하여 이 계곡 절벽에 횡서로 세심대를 새겨 놓고 떠났다고 한다.
  • 숲실·임곡(林谷)
    • 이 마을은 사방에 숲이 울창하여 숲실·임곡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현재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산나물·담배·토종꿀이 생산되고 있다.
  • 대밭마·죽전(竹田)
    • 부룡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 근처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밭마·죽전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대밭을 찾아 볼 수 없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안간리

본래 지례현 서면에 속한 안간, 대평인데 1895년에 서면을 양분하여 하서면에 귀속되었고 1914년에 두 마을을 통합하여 안간리라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다. 부항면 북쪽끝 오지 마을로서 면 소재지와는 7.5km 떨어진 곳에 있는 대평·웃안간·아랫안간 마을이며, 동북쪽은 구성면 월계리·마산리와 접하고, 남으로는 희곡리, 서쪽으로는 파천리와 인접하였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안간(安磵)·안가이
    • 옛날 이 마을은 지세가 나빠 재난이 많았으므로 동리의 북쪽에서 들어오는 액을 막기 위해 동민들은 나무를 심고 둑을 쌓은 후, 편안히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안자와 높은 산 안쪽 골짜기에서 시내가 흘러 내린다 하여 간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안간이라 했다 한 다. 그래서인지 그 후 이 마을에서는 큰 부자가 많이 났다고 한다.
  • 대평동(大坪洞)
    • 마을 뒤에 있는 밭이 넓다고 하여 대평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마을의 지세가 배 모양으로 생겨 한 배 가득 실으면 떠나야 한다고 전해지고 있어 재산을 모으면 이사 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두산리

본래 지례현 서면에 속한 말미갈계인데 1895년 상·하로 나누어 하서면에 귀속되고, 1914 년에 두 마을을 합하여 두산리라 하여 부항면에 편입되었고, 갈계 윗쪽에 신갈계가 있었으나 없어지고 말았다. 부항면 중앙부로 면소재지에서 북으로 3km 떨어진 야산지대에 있는 갈계·말미 마을이다. 갈계 앞 갈계천은 동류하면서 한 바퀴 굽이 돌아 말미에 이른다. 동쪽은 희곡리, 남쪽은 사등리, 북쪽은 안간리와 인접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갈계(渴溪)
    • 조선 태종의 효령대군 10대 손현민이 이 마을을 개척한 후 냇물이 산허리를 감돌아 흐른다 하여 이 내를 갈계천이라 하고, 이 마을 이름을 갈계라 불렀다. 갈계로부터 1km 지점에 새 갈계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 말미·두산·두산리(斗山里)
    • 이 마을의 산 모양이 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말미·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현재 1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새트·새터·금신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희곡리

조선시대에서는 지례현 서면에 속한 교현리였다. 1895년 상·하로 나누면서 하서면에 귀속, 1914년에 두 마을과 중희·외희를 통합하여 희곡리로 하고 부항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교현·내희를 희곡 1리로 나누었다.

부항면 동북쪽 끝으로 사등 2리에서 9.5km 떨어진 야지대에 있는 교현·내희 마을이며, 동북쪽은 희이령을 구성면 임평과의 경계로 하고, 남쪽으로는 유촌리, 서쪽으로는 희곡 3리 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가마고개·교현(轎峴)
    • 왜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교현리 뒷산의 고개가 먼 곳에서 쳐다보면 가마같이 보인다 하여 마을이름을 가마고개·교현이라 하였다 한다.
  • 안희실·내희(內希)
    • 희곡리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다 하여 안희실·내희라 하는데, 희곡리는 안희현·현희성·현희천의 삼희의 희를 따서 희곡리라고 부른다 한다.
  • 앳골·왜골·와야동·중희(中希)
    • 희곡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이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하여 와야(瓦也)의 와(瓦)자가 와(臥)로 바뀌로 음운이 변하여 왜곡·앳골이 되었다고 한다. 위치로 보아 희곡의 중앙에 있다 하여 중희라 하게 되었다.
  • 숫골·수동·외희(外希)
    • 옛날부터 이 마을사람들의 수명이 길었다 하여 수동·숫골이라 했다. 또한 지리적으로 보아 바깥쪽에 있다 하여 외희라 하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누리집 서비스 향상을 위해 만족도 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페이지의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