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조마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조마면

지명유래

기원전 82∼57년에는 변한(弁韓)시대의 12국가 중 주조마국(走漕馬國) 또는 졸마(卒麻. 일본 서기)라 일컬었다가 742∼756년 신라시대에는 상주목 개령군에 속한 조마부곡이었고 1718년 김산군 조마남면(助馬南面)이라고 금릉지에 기록되어있다.
1914년 김산군 조마남면 21개동을 4개동으로, 김산군 남천면 10개동을 3개동으로 통합하고 2개면을 합면하여 김천군 조마면으로 개칭하였다. 조마면은 강곡동. 장암동. 신안동. 신곡동. 삼산동. 대방동. 신왕동이 되었다. 1948년 8월 13일에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으로 개칭하였다.

1962년 3월 26일 행정구역 7개동을 18개동으로 나누었으며, 다시 1971년 7월 1일에 행정구역 18개동을 19개동으로 나누었다. 1988년에 이르면 각 동을 모두 리로 개칭하였다.

김천의 남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감천면과 성주군 벽진면, 남쪽으로는 지례면과 성주군 금수면, 서쪽으로는 구성면, 북쪽으로는 양금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마면의 북쪽에는 감천 중류에 발달한 도암들. 장암들. 신안들 등 넓은 들이 많지만 남부는 산악지대로 농경지가 적으며, 남쪽 끝에는 염속산(870m)이 우뚝 솟아 산의 좌측에는 산지맥이 동북으로 북주하면서 염속봉산과 글씨산(540m). 고당산 등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산의 우측으로는 산지맥이 서북쪽으로 북주하면서 연석산(594m). 동대산. 신달이산. 불두산(428m) 등의 산 봉우리를 틀면서 뻗어 가다가 감천 냇물에 가로 막힌다.

염속산을 발원으로 남천이 북으로 흐르면서 감천에 합류한다. 조마면의 입구인 신안. 장암. 도암은 구성면 덕대산(811m) 동쪽 나직한 산자락을 등지고 앞으로 감천을 끼면서 면 최대의 비옥한 들을 형성하고 있다. 감천(甘川)을 이두식으로 읽으면 감내가 된다. 지명의 분포로 보아 감내는 중앙천의 뜻으로 보아 온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감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터전이요, 삶의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신왕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남천면(건천면)에 속하였으며 수왕. 박리. 용암이라 불렀다. 1914년에 신계. 송정. 박리. 수왕. 용암을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신왕동이라 개칭하였다.

1962년에 박리. 수왕. 용암을 신왕 1동으로 나누었다가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박리. 수왕 두 마을 뒤로는 염속산(厭俗山. 870m) 지맥이 동북으로 치닫으면서 염속봉산과 글씨산(540m) 봉우리를 이룬다.

감천면 고당산(597m)을 향해 다시 북으로 뻗었으며, 박리 마을 서쪽들 건너편의 용암마을 뒤로는 염속산 지맥이 북주하여 흰닭뫼(白鷄山. 469m) 봉우리를 이룬 산자락을 등지고 수왕. 박리 두 마을과 용암마을 사이로 염속산에서 발원하는 대방천이 감천을 향해 북류하며 그 냇물을 따라 59호선 국도가 성주군과 김천시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물앙실. 수왕(水旺)
    • 의성김씨가 이주하여 정착한 후에 이 마을은 물이 왕성해야 김씨 성이 번성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이름을 물앙실. 수왕이라 했다.
  • 박니. 박리(朴里)
    • 약 300년 전에 김해김씨가 먼저 이주해 살았으며 동명을 박리라고도 썼다 하며 마을의 지형이 궁형 또는 바가지형이라고 하는데서 박리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 용바우. 용암(龍岩)
    • 마을 옆에 용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어 용바우. 용암이라고 했으며, 그 바위 아래 깊은 소가 있었는데 그 속에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 송 정(松亭)
    • 약 300년 전 진주강씨가 터를 잡았다 하며 동명을 한수골. 송신이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을 아는 이는 거의 없고, 약 300년 전부터 이 마을 어귀에 소나무와 정자가 있 어서 송정이라 칭한다.
  • 곱또리. 하신기. 하신계(하신계)
    • 약 200년전에 밀양박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그 후 70년이 지나 김해김씨가 들어오고 90년 쯤 전에 성주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 당시는 동명을 곱또리라고 불렀다. 일제시대에 하신계라고 불렀는데 수해로 전에 있던 하천이 없어지고 동리 앞에 새로운 하천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곱똘이란 냇물이 곱돌아 흐름을 이른다. 흔히 곡강(曲江)이라 이르는 바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하회요, 영양과 포항의 곡강이다. 곡강의 속칭으로는 굽은갱이라 함을 보더라도 그리 짐작할 수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방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남천면에 속한 옥계. 유촌. 수방. 사점이라 칭하였으며 1914년에 성궁. 가곡. 대평. 원곡을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대방동이라 개칭하였다.

1948년에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 대방동이라 고쳤다. 1962년에 옥계. 유촌. 수방. 사점을 대방 1동으로 분동하였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대방 네 마을 뒤로는 염속산 지맥이 북으로 뻗은 동대산과 백계산이 산봉우리를 지으며 삼정리 마을 앞에 멈춰서고, 또 그 앞으로는 염속산 지맥이 동북으로 뻗어 염속봉산과 글씨산 봉우리를 지으며 감천면 고당산으로 이어진다.

그 동과 서의 사이를 염속봉산과 염속산 산자락에서 발원하는 냇물이 북류하면서 대방천을 이루고, 그 냇물을 따라 59호선 국도가 성주군과 김천시를 남북으로 지난다. 그 도로를 따라 살티재 부근에 사점마을이 있고, 2km쯤 북쪽으로 수방마을, 또 2km 쯤 북쪽에 유촌과 옥계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사기점. 사점(砂店)
    • 약 200년 전에 김해김씨가 벽진에서 살다가 생활고로 인하여 살티재 만당에 와서 살았는데 화적떼가 무서워서 지금의 마을 자리로 옮겨와서 살았으며, 옛날에 사기그릇을 구워서 팔았다고 해서 사기점. 사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물배이. 수방(水方)
    • 물방골이란 계곡의 이름을 따서 물배이. 수방이라고 부르며, 200여년 전에 오씨가 자리 잡았다고 하나 그 후 김씨와 조씨가 살아 왔다.
  • 버드실. 유촌(柳村)
    • 이 마을은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버드나 무가 많은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버드실. 유촌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두둘개. 옥계(玉溪)
    • 두둘개라는 이름은 마을 뒤쪽의 두둑 위에 들이 펼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옥계란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의 물이 옥같이 맑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여우내. 성궁(省弓)
    •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연중 마르지 않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어서 마치 필요할 때 내리는 비와 같다고 여우내라고 했으며, 성궁이란 이름은 옛날 이 마을에 무사들이 활을 쏘는 곳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 뱃거마. 가곡(柯谷)
    • 성궁 마을의 바깥 쪽에 있다고 뱃거마라고 하고, 가죽나무가 있었던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가곡이라고 한다.
  • 대 평(大坪)
    • 성궁에 살던 사람들이 들을 따라 이주하여 새 동리를 만들었으며, 밀양박씨가 많이 살고 있다. 이 마을 주변에 넓고 기름진 들이 있어 대평이라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강곡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조마남면 구곡이라 칭하였다. 1914년에 강평과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강곡동으로 고쳐 부른다. 1948년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 강곡동으로 개칭하였다.

1962년에 구곡과 월곡을 강곡 1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마을 뒤로는 14km 남쪽에 있는 염속산 지맥이 북으로 신곡 1, 2, 3리, 강곡 2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마을 뒤 불두산(470n)의 산봉우리를 만들고 다시 북쪽으로 뻗어 월곡에서 감천내에 가로막혀 멈춰선다. 마을 앞으로는 12km 남서쪽에 있는 가제산(687m)의 지맥이 북쪽으로 뻗으면서 강곡 2리를 거쳐 마을 서쪽 저멀리 도롱골 뒤에서 감천내에 가로막혀 멈춰 있고, 마을 서북쪽 저 멀리는 구성면 덕대산의 동쪽 나직한 산자락이 장암 1, 2리를 감싸 안으면서 도암들. 장암들. 금단이들 등 큰 들을 이루며 멈춰 선다. 염속산 서쪽 산자락과 가제산 동쪽 산자락을 발원으로 하는 강곡천이 산줄기를 따라 신곡, 강곡 2리로 북류하면서 마을 앞에서 감천에 합류하고, 강곡천을 따라 901호 지방도로가 성주군 금수면과 김천시를 남북으로 마을 앞을 지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금다이. 검단이. 구곡(九曲)
    • 조선시대에 김해김씨가 김산에서 이곳까지 아홉구비를 돌아 들어와 자리 잡은 곳이라 하여 구곡이라고 칭하였다. 지금은 김해김씨들이 거의 떠나고 선산 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특산물로서는 자두와 감자가 있다. 검단 혹은 금다이란 지명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방위로는 물의 북쪽을 이르며 검단(檢丹)은 검은색(玄)으로 거북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여기 아홉구비도 기실은 거북구(龜)를 원의미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 엉거실. 월곡(月谷)
    • 병자년 수해로 인하여 상장에서 살고 있던 선산김씨들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으며 17가구에 선산김씨. 안동권씨. 달성서씨들이 살고 있으며, 마을 동쪽에서 달이 뜨면 달빛이 정겹게 비친다고 이 마을 이름을 월곡이라고 한다.
  • 강바대. 강평(江坪)
    • 마을 뒤와 옆으로 감천지류가 흐르고 있으며 기름진 땅이 들을 이루고 있어 강평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속칭 강바대라고도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신곡리

고려시대에는 성주목에 속한 신곡부곡(新谷部曲)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신곡면(薪谷面)에 속한 신석동(新石洞)이 되고, 1906년에 신곡면이 김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에 나부. 마와. 마곡. 철수. 중리. 신석. 백화동을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신곡동으로 개칭하였다. 1948년에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 신곡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62년에 나부리. 마아리를 신곡 1동으로 개칭하였다.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나부리 마을 뒤 가제산(687m) 서남쪽 산자락을 배경으로 하고 남동으로는 꿀재를 거쳐 염속산 산마루가 마주 보이며, 마아리 마을은 마을 뒤로 염속산 산자락을 등지고 앞으로는 가제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두 마을이 1km쯤 거리를 두고 남과 북에 자리 잡았고, 마을 동남으로 염속산과 서로 가제산 사이를 꿀재가 조마면과 지례면의 경계가 된다. 이곳에서 강곡천이 발원되어 감천을 향해 북류하고 그 냇물을 따라 901번 지방도로가 성주군 금수면과 김천시를 남북으로 지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나부리(羅浮里)
    • 벌 소리가 들리는 마을 또는 벌이 떠 있는 마을이라고 나부리라 불렀다 한다. 20여 가구에 김해김씨. 문화유씨. 순천박씨. 밀양박씨. 달성서씨. 나주최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으며, 과거 특산물로는 양잠을 주로 하였다.
  • 마아리(馬牙里)
    • 마을 뒷산의 지형이 말모양으로 생겼으며, 마을은 말의 어금니 위치에 있다고 마을이름을 마아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 미실. 미곡동(迷谷洞)
    • 농가 호수 20여 가구로 선산김씨. 의성김씨. 벽진이씨. 순천박씨.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으며, 마을 유래는 알 수 없다.
  • 쇠점골. 시점골. 철수동(鐵水洞)
    • 감천의 쇠를 파와서 이 마을 뒷산 밑에서 쇠를 만들 때 쇳물이 흘렀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철수동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중말. 중리(中里)
    • 신곡동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중말. 중리라고 부른다. 현재 20여 가구로 밀양박씨. 순천박씨. 진양강씨. 파평윤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으며, 특산물로서는 양잠이 성행했다.
  • 새수골. 쇄수. 신석(新石)
    • 순천박씨가 500여년 전에 이 고을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며 마을 뒷편에 꼬불꼬불한 쇄수곡이 있어서 새수골. 쇄수라고 했다. 지금은 신석이라고도 부른다.
  • 백화동(百花洞)
    • 이세간이 이 마을에 살면서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효자동이라 하다가 그 후손들이 조상의 덕을 꽃으로 밝히고자 해마다 꽃을 심어 온갖 꽃이 핀다고 이 마을이름을 백화동이라고 지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삼산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남천면에 속한 누산. 삼정리라 칭하였다. 1914년에 누산. 삼정리를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삼산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48년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 삼산동으로 개칭하게 된다. 1988년 동을 리로 고쳤다. 누산 마을 앞으로는 염속산 지맥이 북으로 뻗어와 신달이산(469m)과 흰닭뫼 봉우리를 짓고 다시 북동으로 뻗어 남천 내를 경계로 하면서 삼정리마을 동남쪽에 머물렀다.

누산 마을 뒤로는 흰닭뫼에서 그 지맥이 다시 서북으로 뻗어 오두재를 거쳐 불두산(470m) 봉우리로 솟아 삼정 마을 뒤를 거쳐 강곡 1리를 경계로 하면서 감천에 가로막혀 멈췄고, 그 사이를 흰닭뫼를 발원으로 한 삼산천이 북류하고, 그 내를 따라 일차선 도로가 신곡 중리마을 앞 901번 지방도로와 신왕 하신기마을 앞 59호선 국도를 동북으로 통하고, 누산마을 뒤로는 누산고개를 거쳐 면 소재지에 이어지는 일차선 도로가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누피. 누산(樓山)
    • 이 마을은 옛날에 늪이 있어서 누피라고 불렀다. 또 산마루가 높아 다락과 같다고 누산이라 했는데 오늘날 유산이라고 부른다.
  • 삼정. 삼정지(三亭池)
    • 이 마을에는 세 개의 정자와 못이 있어서 삼정. 삼정지라고 부르며, 농가 호수 40여 가구, 남평문씨. 영양천씨 등 여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특산물로서는 참외와 오이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장암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하였고, 상장. 하장이라 불렀다. 1914년에 도암. 예동. 점동을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장암동이라 고친다. 1948년에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 장암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62년에 상장. 하장을 장암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마을 앞으로는 감천 냇물이 천천히 북류하면서 남으로는 강곡 1리, 동으로는 감천면, 북으로는 장암 3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 뒤로는 구성면 덕대산(811m) 동쪽 나직한 산자락이 멀리 뻗어와 장암태를 이루며 도암을 경계로 하고, 그 지맥 이 마을 뒤쪽 배경을 이루면서 마을 앞 넓은 장암들을 이루고 있다. 마을 바로 앞으로는 901번 지방도로가 성주군 금수면과 김천시를 남북으로 지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웃장바우. 상장(上壯)
    • 상장과 하장의 경계지점에 3층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장바우라 하고 위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웃장바우. 상장이라 하게 되었다.
  • 아랫장바우. 하장(下壯)
    • 본래 김산군 조마면으로서 큰 바위가 있어서 장바우라 하였다. 이 삼층 바위를 중심으로 아래쪽에 이 마을이 위치하여 하장이라고 하며, 현재 안동권씨. 강양이씨. 선산김씨가 주로 살고 있는 마을로 특산물로는 감자 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 새말. 도암(道岩)
    • 1521년 정일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자기의 호를 따서 도암이라 했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새말이라고도 부른다. 특산물로 감자와 파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정일(鄭鎰)부부의 정려각이 있다.
  • 예 동(禮洞)
    • 군정묵이란 사람이 하장마을에 살다가 이주해서 새터를 잡을 때에 동방예의지국의 예자와 동자를 따서 마을이름을 예동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 점말. 점동(店洞)
    •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옹기를 구웠다고 점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광복 후로는 질그릇 굽는 일이 없어졌으며,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신안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한 죽정리라 불렀다. 1914년에 죽정. 신동. 구미. 지동. 신하. 안서. 신기. 신촌을 통합하여, 김천군 조마면 신안동이라 칭하였다. 1948년에 김천군 김천읍의 김천시 승격으로 금릉군 조마면 신안동으로 고쳤다. 1962년에 행 정구역 7개 동으로 분동하면서 죽정을 신안 1동으로 개칭하였다.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 하였다.

마을 앞 동쪽 건너편에는 감천 냇물이 천천히 북류하고, 남으로는 신안 2리, 동으로는 감천면, 북으로는 김천시와 경계를 이룬다. 마을 뒤 서편으로는 구성면 덕대산(811m) 동쪽 나지막한 산자락이 멀리까지 뻗어내려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이룬다. 마을의 약 1km앞으로 901번 지방도로가 냇물을 따라 성주군 금수면과 김천시를 남북으로 지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죽정. 죽전(竹田)
    • 1879년경 성산배씨 상유의 후손이 안새래. 내신에서 농토를 따라 분가하게 되었는데 죽림이 우거진 곳에다 마을을 형성시키면 절개 굳은 자손들이 출생한다고 하여 대밭이 많은 이곳에 마을을 이루어 마을이름을 죽정(竹汀). 죽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 중동(中洞)
    • 옛날에는 구미(九尾)라 불리었는데 병자년 수해로 부락이 유실되고 지금의 마을위치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새래라는 마을의 가운데 있다고 중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안새래. 내신하. 내신(內新)
    • 1658년경 성산배씨 금겸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만덕동이라 하였는데, 1758년경 화순최씨와 함께 한 마을에 살게 되면서 밧새래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안새래. 내신하. 내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밧새래. 외신하. 외신(外新)
    • 조선선조 때 화순최씨 세영이 서울서 낙향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신하라고 하였으며, 마을이 안새래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밧새래라고 부르며 외신하. 외신이라고도 한다.
  • 안 서(安棲)
    • 화순인 최중홍의 9대손인 하대가 효행이 지극하여 어버지가 별세하자 묘아래에 초막을 지어 놓고 3년 동안이나 복상하였으나 모친의 정을 잊지 못해 1801년에는 묘소 가까운 곳에 집터를 마련하여 정착하면서 조상이 편안히 사시도록 한다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안서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 서낭댕이. 성황당. 지동(只洞)
    • 조선 정조 때부터 생긴 고개라 이 마을에 있어 행인들이 왕래하면서 돌이나 동전을 던져 행로의 무사함을 비는 서낭당이 있다 하여 마을이름을 서낭댕이. 성황당이라 불렀다 한다.
  • 새터. 신기(新基)
    • 이 마을은 병자년 수해 이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새터. 신기라 이름지었다. 마을 창건 당시 성산배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화순최씨. 성산배씨와 기타 성이 40여 가구로 되어 있으며, 특산물로는 자두와 포도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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