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구성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구성면

설화

최씨담(崔氏潭)

상원리 방초정(芳草亭)앞에 있는 못이라고도 하고 상원리 남쪽 산 밑에 있었던 못이라고도 한다. 임진란에 화순최씨(李廷馥의 妻)가 친정(양천동)에서 시가로 오다가 왜병에게 쫓기어 정절을 지키려고 이 못에 투신 했고, 노비 석이(石伊)도 뒤를 따라 투신했는데 석이의 비석이 근래 이 못에서 발견되었다.

치마바우

하강 2리 강성마을에 옛날 박씨 집에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가난에 쪼들리어 여자아이를 치마로 싸서 바위에 버렸다. 한 마을에 살다가 이사 간 정씨가 고향에 돌아오다가 치마바위에서 울고 있는 계집아이가 바위에 무늬가 나도록 울어대어 데려가 길렀다. 아이가 성장하여 박씨 집 총각과 혼인을 맺었는데, 하늘이 오누이 간의 혼인을 벌주어 벼락이 바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덕대산 산성싸움

흥평 2리의 이야기로 고려말 정몽주의 문하 안동장군 이미숭(李美崇) 과 진서장군(鎭西將軍) 최신(崔信)이 이성계의 등극에 반대하여 관군과 충청도 미산(尾山)에서 접전했다가 패하고 덕대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성주를 거쳐 원산(元山.가야산맥)에서 접전 끝에 전사했다 한다. 임진왜란에는 주민들이 이곳에 피난하여 성을 수축하고 전재에 대비했으나 접전은 없었다 한다.

서씨묘의 사두혈(蛇頭穴)

옛날 흥평 2리 고로실 부자 서씨 집에 머슴 사는 최씨가 부자가 되어 보고 싶어 국사봉에 풍수를 데리고 가서 명당 묘터를 잡아 놓았다. 뒤에 시주 온 중에게 주인 서씨는 박대를 하고 머슴 최씨는 후대했는데, 최씨가 서씨의 박대를 못 이겨 서씨 집에서 도망갈 방도를 물었더니 중은 묘터를 호미로 세번 긁으라고 일러 주었다. 그대로 했더니 그 묘터는 사두 혈이라 비가 와서 사태가 나 묘터가 허물어져 서씨는 망하고 최씨는 그 집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시묘(侍墓)골

흥평 2리 진흥에서 4㎞ 떨어진 골짜기에 경주최씨 산소가 있는데 이곳에서 시묘하는 동안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가 항상 보호했다 한다.

월입평전(月立平田)

성산 여씨가 임진란 때 둿골에서 피난 중 계집종 월립(月立)이 양식을 구해 오면서 굶주리는 상전을 위해 자신의 양식을 먹지 않고 돌아오다가 이 곳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는데 그곳에 월입평전이라 한다.

성산여씨의 집터

미평 남쪽 산 밑에 있는데 성산여씨가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던 곳이라 한다. 여씨가 노인을 학대해 오다가 도사가 도술을 써서 여씨를 멸망하게 한 뒤 영천이씨와 은진송씨가 들어왔는데 송씨만 번창했다고 한다.

상원 연안이씨 역장묘

구성면 상원 마을 뒤 매봉산 기슭에 연안이씨 말정(末丁. 연성부원군)의 묘가 아랫쪽에 있고, 그의 후손들 묘가 윗쪽에 있어 역장(逆葬)임이 분명 한데, 보편적으로 기피하는 현상이다. 그 유래는 말정의 현손 이호민(李 好閔)의 주장으로 역장했다는 것이다. 호민의 좌찬성을 지내고 부원군으로 봉군된 인물로 임진란때 청원사(請援使)로 중국에 가서 이여송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이때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널 다리를 조선의 관목(棺木)으로 놓으라 요구하였는데, 이는 조선에 인물이 많이 나서 중국을 넘보는 것을 막기 위해 명당의 혈을 끊으려는 심산에서였다고 한다. 나라가 위 란에 처한지라 조정에서는 굴총대감(掘塚大監)을 임명하고 전국의 묘를 파서 얻은 관목으로 압록강 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이때 매봉산 연안이씨의 묘는 금채락처(金釵落處)의 명당이지만 역장인지라 명당에 들지 못 하고 굴묘 수난을 면했는데, 이호민의 주장은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어깨에 올라 앉는 것은 사랑의 교감이지 망발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는 핑계이고 굴묘 수난을 예측한 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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