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구성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구성면

역사적 인물

군자금 모아 항일한 이 명균(李明均)의사 (1863 - 1923)

이 명균의 본관은 연안, 호는 일괴인데, 1863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이 늑탈되자 편강렬의사 등과 해인사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하려고 획책하였으나 이등이 해인사에 들리지 않아 무위로 끝난 바 있었고, 1919년 영남 유림들이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조선독립청원서를 보낸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했다가 검거되어 대구법원 검사국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만주에서 항쟁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 군정서의 노백린장군과 비밀연락으로, 문경의 의병대장 신태식, 영주의 김찬규의사, 김산의 이응수의사등과 구성면 상좌원리 나곡산재에서 밀회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해 보내기로 합의하여 대한 독립 후원 의용단을 조직하였다. 신태식은 경북단장, 김찬규는 경남당장, 이응수는 총무부장, 선생은 재무부장으로 부서를 분담하고 군자금 조달에 나섰다.

안동, 청송, 군위, 영천, 영덕, 창녕 등지에 단원들을 보내어 부호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큰 성과가 없자 선생은 천석지기의 사유재산을 처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군자금으로 10여만원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이로 인해 가족의 생계에도 지장이 많았으나 선생은 태연했다.

임시정부에서는 선생을 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에 임명하니 취임하여, 사업을 넓혀서 만주 방면의 독립군 양성자금까지 조달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한편으로 자금 조달의 영구책으로 2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상주, 김천에 철공소를 차려 그 이익금으로써 충당하려고 했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이응수, 신태식등 40명이 구금되고 송금하려던 8만3천원도 압수당하고 말았다.

심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게 되자 대구 복심법원 이우익 판사의 주선으로 가석방 되었으나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급기야 1923년 향년60으로 순절하였다. 1968년 정부에서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70년에 사업기념회가 김천 자산공원에 이명균의사 순충 기념비를 세우고 선생의 유해는 국립묘지로 옮겨 모셨다. 1999년 향리인 구성면 상좌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한말의 백이숙제 여 채룡(呂彩龍) (1866 - 1937)

"나는 대한 신민으로서 어찌 너희들의 금수지군을 섬기겠는가 ! 너희들 왕의 죄는 천고에 없는 무도한 죄다.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우리 나라를 내어놓지 않으면 내가 죽기 전에 꼭 내 나라를 찾는데 전 유림이 합심 거병 할 것이다." 이는 1924년 2월 여채룡 의사가 일경에 잡혀가 법정(김천법원)에서 일본인 재판장에게 한 말이다.

여 채룡의사는 1866년에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서 태어났다. 21년에는 일본의 열 가지 죄목을 논거한 『일왕10죄론』과 "일본이 저지른 죄는 지하의 귀신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불의를 범하지 말라.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거병가주하겠다." 는 서한을 총독에게 보냈다. 23년에는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을 없애고 일본놈을 합심공토하자"는 광고문과, "임진에는 이 강토를 짓밟더니 이번에는 보호라는 미명아래 나라를 강탈하니 원수를 갚기 전에는 국상을 벗을 수가 없다."는 『哀國歌』와 함께 "일본놈을 격멸할 때는 왔다. 공력 합심하여 일어서자." 라는 포고문을 전국 향교를 통해 유림에게 우송했다가 상주경찰서에 발각되어 김천법원에서 10월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재판정에서는 끝까지 위엄을 갖추어 일본 침략을 매도하면서 재판장에 항거하여 방청인들을 감읍케 했다. 28년에는 일제치하의 납세를 거부하고 전답소산의 곡물마저 먹지 않겠다고 홀로 송림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초근목피로 생명을 보존하면서 바위에는 "일편조선"이라고 쓰고 "채미가" 같은 애절한 우국시를 지으면서 매일 아침 북망호곡하고 매일 밤 도천복국하다가 입산 9년만에 영양실조로 죽으니 유림에서 유림장으로 예우하고 선생을 朝鮮義士라 칭송하였다. 선생의 절의는 백이숙제의 수양산 잠적의 고사와 다를 바 없고, 1956년 성균관에서 표창하고 유림에서 유허비를 세웠다.

궁중무당을 쫒아버린 이선동

공은 하빈인으로 자는 언부, 호를 강촌이라 했다. 벼슬은 통훈대부로 남해 현령에 이르렀다. 공의 성품은 염개(조용하고도 흔들림없이)하고 세상의 불의에 타협치 않는 곧음이 있었다.

세종조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궁중 여인들이 왕의 안질을 고치려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을 보고 성균관 제생을 데리고 가 쫒아버렸다. 세종께서 이 사실을 알고 "이모(공을 일컬음)야말로 바른 선비다." 칭찬하여, 특별히 남해 현령을 제수했던 것이다. 공은 고을에 나가서도 선정을 베풀어 조정에서도 공을 신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은 세조의 찬위가 있을 때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금릉군 구성면 기로도(현 광명리)에 숨어 평생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특히 단종이 승하한 3년 동안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집 뒷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망연히 눈물을 흘려 더욱 공의 지조를 엿보게 했다.

공이 작고하자 향중 사림에서 공의 높은 덕을 흠모하여 계를 조직하여 그 뒤(경인년)에 기로동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현산 이현규(玄山 李玄圭)찬이다. 사망연대는 미상이며 묘소는 김산과외면(현구성면) 대방내곡(大方內谷)에 있다.

참고자료 : 교남지, 조선역대명신록 16권, 김천군지, 금릉승람

의리에 산 의병대장 여대로(呂大老) (1552-1619)

선생은 성산 여씨 응구의 아들로 1552(명종 7년)금릉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자를 성우라 하고 호를 감호라 하였고 남명 조식의 문하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그 아버지는 늘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빛낼 아이다.'고 더욱 격려시켜 자라매 학식 및 문장이 크게 진취되어 약관에 이미 그 재능이 널리 알려졌다 한다.

8세에 어머니상을 당했을 때는 예절이 어른을 능가할 정도였고 1577(선조 10년) 부친상을 당하여 극진한 예로써 3년 여묘하고 계모를 섬기기에 친어머니 섬기기보다 못한 바가 없었다. 그 뒤 1582년(선조 1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정구, 정여헌, 정경세 등과 교의를 맺고 같은 해에 사마시에 합격한 이이첨이 선생의 명망을 보고 은근히 친교를 원했지만 만나주지 않았고 어쩌다 만나게 되면 길을 피해버렸다 한다. (당파가 다르기 때문) 이 일은 선생의 환로에 크게 저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1592(선조 25년)임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면, 곽재우, 권응성 등과 지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초유사 김성일의 천으로 지례현감이 되고 인근 읍4,5군의 의병장이 되어 향토수호와 국토방위에 진력하였다. 1594(선조 27)년 의성현령이 되자, 전후의 황폐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염병이 돌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위해 봉급을 털어서까지 구제하여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1607(선조 40)년 합천군수로 나갔을 때 정인홍의 집이 군계에 있었다. 정인홍은 이미 조정 대신이 되어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고 조정일을 함부로 하던 당대의 세도가였다. 하루는 선생이 인홍의 집앞을 지나니, 그가 의관을 갖추고 나와 정중하게 맞아, 같은 향토민으로서 우의를 맺고 싶다고 하자, "상공이 어찌 시속에 얽매이고만 있겠습니까?" 하며 장읍하고 절은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정인홍도 이미 선생의 명성을 아는지라 그 이상은 어찌할 수 없었는데 뒷날 또 종이와 부채를 좀 달라고 요청해 왔을 때 이를 거절하고 그 답으로서 '가야산 일찍 온 서리에 딱나무는 다 시들고, 세속의 염열 또한 이 산중에 든 것을" 하는 글을 보냈다고 한다. 이일로 선생의 벼슬길은 가로막는 자가 많아 크게 기용 될 기회가 없었고, 이이첨, 정인홍 등이 영창대군 대신 광해군을 옹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큰 변이 생길 것을 예감하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명망높은 학사들과 담론하며 세상을 피해 살던 중 1619(광해11년)에 작고하니 묘는 과곡면 어모곡 선영하에 있고 경양사에 제향하였다. 또한 유허비는 금평리에 있다.

선생은 사헌부 지평으로 잠시 내직에 있었을 뿐 외직에 주로 있었다. 나라에 혼란이 있을 때는 의병을 일으켜 충성을 다 했고 지방관이 되어서는 백성을 위해 어버이 같은 선정을 베풀었고,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평생을 의에 살다 갔다 하겠다

참고자료 : 조선억대명신록 12, 속수상강록, 금릉승람, 품천사, 김천군지, 행장

항일의사 여중룡 (1856 - 1913)

여중룡이 일본 경찰에 잡혀 저들의 회유에 선생은 "신라 박제상이 너희 나라에 잡혔을 때 '신라의 귀신이 될 망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하다가 맞아 죽었는데, 지금 나역시 그와 꼭 같은 심정이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다.

여중룡을 1856년 구성면 금평리에서 태어나 나이 40에 이르렀을때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허위, 강심형, 조동석등과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항면 대야리에서 이를 제지하려는 관군과 싸워 패하자 서울로 올라가 전국의 애국지사를 규합 싸우겠다는 독립운동 단체 충의사를 조직하여 활약했으며, 한편으로는 황성신문을 통하여 우리나라 외교, 정치, 군병, 재정 등의 혁신을 주창하여 경국론을 펴서 당시 허약한 정부에 매운 자극을 주었으며, 우용택, 이병구등과 정부에 누차 정서를 보내어 침체된 국권회복과 배일 자강책을 건의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철병귀국을 강요하는 외에, 황제에게는 을사조약의 무효화 선언과 오적의 주토를 상소하고, 각국 공사관에는 일본 침략을 폭로하고 후원을 요청하는 공한을 대담하게도 누차에 걸쳐 보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일이 많았다.

1906년 4월에는 말과 글로서는 일본 침략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우용택, 이병구, 조우석 등과 일본공사를 폭파하여 궐기의 신호등을 커려다 지모씨의 가택수색으로 비밀문서가 발각돼 체포되어 심한 고문으로 늑골이 부르지는 등의 심한 상처를 입었다. 7개월만에 방면되어 1907년에는 허위, 이강년, 강형원 등과 서울 혜화동에 모여, 허위와 강형원은 안동 풍기에서 기병하여 원주를 거쳐 상경하고, 이강년은 상주, 문경에서 기병하여 충주를 거쳐 상경, 여중룡은 김산에서 기병하여 전주 최익현군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전군이 합류하여 항일전을 크게 벌이기로 혈서로써 맹세하였다. 기병의 사명을 띠고 김산으로 돌아와 쉴사이도 없이 활약하면서 김산 무기고에서 포80자루를 거두고, 군병 180명을 모았다. 날이 갈수록 의병군에 많은 군사가 모이자 8월 10일에 무주를 거쳐 전라도로 행군키로 작정하고, 9일 밤 만반의 준비를 끝내자 연일 연야의 격무에 고문으로 얻은 병이 악화되어 많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길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913년에 " 내 비록 살아서 적을 쳐부수지 못했을 망정 죽어서 사나운 귀신되어 꼭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어디 두고 보자"라고 뼈에 사무친 유언을 하고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9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김천시 남산공원에는 선생의 순충기념비가 세워졌다.

여진족 토벌의 장상 이 숙기

공은 1428년(세종8년) 연안인 연성부원군 이 말정의 아들로 구성에서 태어났다. 자를 공근이라 했고, 효용이 뛰어났으며 큰 뜻을 품고 있어 문무를 겸한 수업을 받았다. 1453(단종 1)년에 25세로 무과 일등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나갔다가 1456(세조 2)년 중시에 급제한 후 가전훈도로 왕이 진을 사열할 때마다 왕명을 전달하였고, 평양·영변 판관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공은 공적인 일에 과감하고 법대로 처리하여 성질이 너무 강직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1467(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맹패장이 되어 남이등과 평정에 나서 6월 19일 북청 공방전에서 승리를 하고 8월 8일 마흘현에서 이시애를 생포, 목벤 공로로 절충장군으로 특진, 난이 끝난 뒤에는 오위도총관에 임명되고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일등훈에 올랐다. 곧이어 이조참판, 연안군에 봉해졌다. 이해 겨울에 원나라의 원병을 요청받고 나아가 건주위에서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우니 자헌대부가 가자되기도 했다. 그 후에도 내외직을 두루 거치었고 1471(성종 2)년 순성좌리공신 4등훈을 받았으며 1479(성종 10)년 다시 건주위를 정벌, 호조판서에 나갔다가 1489년 졸하니 시호를 정양공이라 내렸다.

한평생을 문무를 겸한 장상으로서 국내적으로 반란을 진압, 안정을 되찾게 했으며 국외적으로 여진족 토벌에 국위를 선양한 공은 이 지방의 자랑만은 아닐 것이다. 묘소는 용인군 현내면 남곡리 동곡 연안궁에 있으며 현재 구성 상원리에 공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공의 유물로 공신홍패, 일산, 노비문서 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자료 : 금릉지, 조선환여승람, 조선역대명신록, 국사대사전, 한국인명사전, 교남지, 품천사

소나무도 상복을 입었다는 이장원의 효심

효자 이장원은 연안인 현감 구령으로 현손으로 1560(명종15)년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자는 호원, 호는 초당이었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초년에 모친 상을 당해 거려(묘 옆에 임시로 지은 집)3년에 어머니를 생각하여 흰죽만 계속 먹었고 슬퍼하고 예절을 갖춤이 오히려 어른보다 나은 바가 있었다.

공은 비록 집이 가난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두어 어버이의 식성에 맞게 하였으며 임진왜란에서 부모를 모시고 대항면 삼성암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두 호랑이가 이들을 호위하여 끝까지 떠나지 않아 出天의 효심에 호랑이도 감탄했다 한다. 또한 공이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여묘(묘살이)한 때는 묘 옆의 소나무가 상복을 입은 듯 희게 되었더니 만 3년이 지나자 다시 푸르게 살아났다고도 한다. 하늘에 닿은 효심에 동식물까지도 감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효자 이장원을 놓고 보면 우연이나 기적만이 아닐런지 모른다.

선조조에 음직(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나아가는 제도)으로 충무위 부호군이 되었다가 1649(인조 27)년 89세로 영면하였다. 묘소는 구성면 작내리에 있으며 1897(고종 34)년에사 어사 조경의 알림으로 나라에서 사재감 첨정을 중직하고 충효당에 향사케 했던 것을 현재는 구성 상좌원리 경덕사로 옮겨 제사드리고 있다.

최씨담에 서린 열부 최씨

남편인 임란의 지사 이정복이 우국으로 생을 마쳤다면 그 부인 최씨는 절부로서 남편에 못지 않은 생을 마친 분이다. 절부 최씨는 화순인 율과 상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절부 최씨는 17세에 이 정복과 결혼을 했는데 아직 신행 전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적이 들이닥치자 죽더라도 시가에 가 죽으리란 생각으로 감천면 하로에서 가족과 함께 구성 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상좌원에 있는 시가에 들러니 이미 시가 식구들은 피난을 떠난 뒤라 수소문 끝에 선대의 산소가 있는 능지산에 있음을 알고 그리로 가던 중 왜적을 만나게 되었다. "깨끗하게 죽는이만 못하다" 고 생각한 절부 최씨는 종 석이에게 자신이 입었던 옷을 벗어 부모께 전해 주기를 당부하고 자기는 명의(죽은 사람이 입는 옷)로 갈아 입고 깊은 못에 스스로 뛰어 들었다. 이소식을 들은 그 가족도 못에 빠져 죽었다. 주인을 잃고 어찌 혼자만 사랴 하고 종 석이도 함께 빠져 죽으니 뒷 사람들이 이 못을 최씨담이라 불렀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현재 구성면 상원리 방초정 옆에 정려각이 있고 『충로석이지비』는 그간 앞 못에 파묻혔던 것을 1975년에 발견, 절부 정려각 안에 같이 세워져 있다.

정려각의 목판에 새겨진 글씨는 인조의 하사필이다.

보우(普雨) 축출에 앞장섰던 여 응구 (1523 - 1577)

선생은 성산 여씨로 1523(중종 18)년 구성에서 태어났다. 자를 문서(文瑞)라 하고 호를 송오(松塢)라 했다. 선생은 어려서 그 총명함이 남을 놀라게 했는데 8살 전에 참새새끼를 잡아 논 일이 있다. 서당에 가 글을 읽다가 중국 역사책인 사기 중 은탕해망(殷湯解網)조에 이르러 잡았던 참새를 살려주어 옆엣 사람이 이상해 물으니, "옛 사람이 이미 놓아주었는데 나는 어찌 잡고만 있겠습니까?해서 듣는이를 감탄하게 했다 한다.

1546(명종 1)년 중사마에 합격하고 신재 주세붕에게 문을 닦았다. 특히 남명 조식 선생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명종조에 중우를 축출하는데 영남 유림이 24번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 14, 18, 24번째 선생이 소문을 쓴 것이었다. 1570(선조 3)년 노수신의 천거로 김천찰방이 되어서는 영남의 교통요지로 민폐가 심하던 일을 시정하고 해이해진 규율을 바로잡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선생은 늦게까지 학문을 연마하여 1572(선조 5)년 5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만학의 본이 되기도 했다. 잠시 성균관 학유로 있다가 귀향하여 감호변에 정자를 매고 현사들과 강론하다 1577(선조 10)년에 작고하여 묘소는 구성면 어모곡에 있으며 대제학 강현이 찬한 바가 있다. 선생의 저술로 성리설(性理說)및 예서가 많았으나 임진란으로 다 소실되고 선생은 경양서원에 제향되었다.

참고자료 : 금릉승람, 김천군지, 품천사, 조선환여승람

한말의 지사 이석균 (1855 - 1927)

공은 연안 이씨 준성의 아들로 1855(철종 6)년 구성면 상좌원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윤(公允), 호를 소암(小庵)·서주노민(西周老民)이라 했다.

천질이 강직하고 명석하였으며 장난이라도 진위(眞僞)를 밝히고야 마는 성미이기도 했다. 어려서는 학문으로 덕망이 높은 아버지와 백부 연성 아래 엄한 훈도와 학문적 소양을 닦았으며 뒤에 사미헌 장복추 문하에서 성리학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특히 퇴계의 이기론에 잠심한 바 있다. 또한 공은 농촌의 현실을 직시하며 세제에도 비상한 관심을 쏟아 「반계수록」중 전제고설등에도 깊이 교구한 바가 있었다.

공은 학문을 현실에 적응시킴으로 성취시키려 한 분으로 예제에 있어서도 남의 모범이 되었으니, 1886(고종 23)년에는 부인과 부모상을 당하여 그 예의범절이 가례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다 한다. 공은 이 상을 당한 후는 더욱 벼슬길에 뜻을 꺾고 학문에만 전심하여 당시의 석학들인 곽 종석, 이승희, 장석영 제씨와 학문을 강마하여 날로 사림의 추숭을 받아갔다. 한편 제자를 교육하는 자리에선 은연중 항일정신을 고취하는가 하면,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전국 유림동지와 같이 독립청원서에 서명, 독립운동을 돕는 지하운동을 하다 잡히어 모진 고문을 받기도 한 우국지사였다. 이 사실은 서울 장충단 공원에 세워진 기념비에 공의 업적도 함께 새겨져 있다.

공은 명실공히 한말의 한학자로서, 지사로서 조선선비의 바른 정신을 세운 분이라 할 수 있다. 공의 저술로 「문집 5권」「주자정전유설참고략」「가향이례참고략」각 1권은 이미 간행되었고 미간으로 「주자어류고략」9권, 「고략의견」1권, 「선성선사」1권, 「연기신편유설」1권, 「사례유취」1권, 「시서역례사단설」4권 등이 있다.

공은, "내 이미 성현의 말씀을 들었는데 또 무슨 머뭇거릴 일이 있느냐?"는 당신의 말씀대로 73세를 일기로 스스로 학문에 힘쓰고 후진을 가르쳤으며 나아가 보국에 앞장서서 조선혼을 불사른 분이라 하겠다. 1927년에 작고하여 묘는 상좌원리 도동 안산 나정곡에 있고 묘갈명은 야성 송준필이 찬했다.

참고자료 : 품천사, 조선환여승람, 김천군지

소학증해를 남긴 이 수호(1744 - 1796)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몸소 실천한 형제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이수함, 수호 형제이다. 형인 이수함은 연안 이씨 급의 현손으로 1739(영조 15)년 구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양숙, 호를 백인재라 했고 어려서부터 가례집안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예의범절이 남달리 발랐다 한다. 가례증해의 저자인 명성당 이의조 밑에서 아우와 같이 수학했는데 예법에 맞는 행실에 모두들 칭찬했다 한다.

9살때부터 홀로된 어머니를 지성껏 모시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7년이나 몸저 누웠는데 형제의 효성이 지극하여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약을 가르쳐 주어 어머니께 드리니 특이한 효험이 있은 적이 있고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우와 함께 3년을 시묘하니 세상에서 이들을 이효(李孝)라고 일컬었다. 또한 형제는 우애가 두터워 담장 없는 한 울에서 평생을 살면서 서로 감춰둔 마음이 없었다 한다. 1809(순조 7)년 작고하니 사복시정이 증직되었다.

아우 소호는 효성만 지극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 성과도 컸다. 선생은 호를 진암이라 했고 1744(영조 20)년에 태어났다. 형과 함께 집안 아저씨인 이의조에게 예학을 배웠고 뒤에는 심재 송환기(송시열의 5대손) 밑에 가 경예학을 닦았다. 특히 선생이 저술한 소학증해는 간행되어 널리 세상에 알려져 어린사람의 교과서로서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그 외에도 「사례유회」「계몽일득」「춘추의견」「곡례의의」등의 저술을 남겼다.

선생은 일찌기 어머니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림으로 회생시키려 한 효성이 있을 뿐 아니라 학문적 업적이 많아서 관찰사 김이영의 추천으로 죽은뒤 동몽교관이 증직되었으며 1796(종조 20)년에 작고하여 심재 송환기가 묘갈문을 썼다.

가례가의 이의조 (1727 - 1805)

주자의 <가례>를 증수 해설하기를 2대나 걸려 이룩한 집안이 있다. 이들은 바로 연안이씨 윤적과 의조의 부자간이다. 이윤적 선생은 1703(숙종29)년에 구성 상좌원에서 태어났다. 도암 이재 밑에서 수학하고 평생을 예학에 몸바쳐 연구하였다. 선생은 머릿속에 늘 관홍상례로 인한 전국적인 예식의 불통일, 나아가 국가적인 의론의 분열을 통감해 왔으며 어떻게 하면 보다 우리 것으로 소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왔다. 그래서 선생은 주자의 <가례>를 대본으로 하고 고금의 주장을 모아 보다 정교하면서도 편의를 도모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해설을 겸한 <가례증해>에 손을 댔던 것이다.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중립의 입장에 서서 제가(諸家)의 설을 모으고 거기 해설을 가하고 자신의 의견으로 결론을 내리는 작업은 당시로 봐서는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결국 선생은 이 큰 업적을 유언으로 아들에게 완성시켜 줄 것을 당부하고 작고하니 1756(영조 32)년이었다. 나라에서 선생에게 효행으로 증 동몽교과, 다시 그 학문적 업적을 기려 증직으로 집의(執義)를 내렸고 겸재 박성원은 그 묘갈에서 숭례처사라 그 덕을 기리었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의조선생은 1727(영조 3)년에 태어났다 자를 맹종, 호는 경호·명성당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남들을 놀라게 했다 8세에 소학을 마치었고 15세에 성이홍에게 배우고 다시 운평 송능상(송시열의 현손)에 나아가 배웠다. 당시의 학자였던 윤봉구, 김희, 송환기 등과 강론하여 예학에 크게 앎이 있었다.

선생은 단단한 학문적 기반을 다진 후 설흔 살이 넘어서야 아버지의 유업에 손을 댔다. 그후 13년이란 시간이 걸려 10권 10책의 방대한 <가례증해>는 완성되었고 1792(종조 16>년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방초정에서 후진을 양성하는가 하면 한평 저술에 힘을 기울여 <의요보유>2책, 경의수차 4책을 내는 동안 나라에 그 학문적 공적이 들리어 1799(정조 23)년 공능참종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해 나아가지 않자 다시 첨중추오위장을 제수받았다.

1805(순조 5)년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이조참의 성균관 제주를 증직하였으며 묘소는 구성면 상원리에 있다.

참고자료 : 한국사대사전, 세계인명사전, 금릉승람, 교남지, 조선환여승람, 충효집(李仁和)

향토지의 선구자 여이명 (1650 - 1737)

공은 성산인 여대로의 후예로 1650(효종 1)년에 구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명세, 호를 수봉이라 했는데 효성스럽고 우애로움이 남의 본이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났고 양사당(養士堂) 창건에 주도하여 지방 교육에 일역을 담당한 공덕이 크다.

공의 저서로는 하락도(河洛圖)및 금릉승람이 있는데 금릉승람은 현존하는 김천, 금릉을 총망라하는 종합 향토지로는 최고본(最古本)이며 체재도 훌륭하고 사료적 가치는 정평이 나있다. 1737(명조 13)년 작고하여 묘소는 부항 안간리에 있다.

참고자료 : 김천구지, 조선환여승람

자연을 벗삼은 문장가 이숙황

연성부원군 이말정의 맏이로 이숙기, 이숙함과는 형제간이며 태종 연간에 태어났다. 자는 희로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천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지조가 굳었다.

1441(세종 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한 후 현감, 성균관 직강이 되었으나 천성이 세속에 얽매이길 싫어하여 부항면 사등에 안주하여 시(詩)·서(書)·금(琴)·주(酒)로 물욕없이 지냈다. 문장이 수아(粹雅)하여 당시 사림(선비들사이)에서 추앙된 바 있으며 현재 지례향교중수기문이 있고, 사망 연대(제사일은 10월 19일)도 미상이며 묘소는 상원 후곡에 있고 군위송호서원에 향사되었다.

참고자료 : 김천군지, 교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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