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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재

양금동

양금동

고성산의 동남쪽을 둘러싸고 동쪽 감천내 너머에는 지좌동이 있고, 북쪽은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용암동과 접하고, 서쪽은 남산동과 인접하다.

조선시대에는 좌동·우동·약수동의 자연부락이 1914년에 황금정(黃金町)으로 통합되어 1948년에 황금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고, 한편으로 조선시대에 상리·중리·하리·양곡동을 하로(賀老)라 부르는 자연부락과 노천마을을 1914년에 양천동으로 합동하고 일제시대에 도로변에 형성된 신기동을 병합했다. 1998년에는 황금동과 양천동을 통합하여 양금동으로 되었다.

양금동을 조선시대, 1914년, 1946년, 1998년 순으로 나타낸 표입니다.
조선시대 1914 1946 1998
좌동, 우동, 약수동 황금정 황금동 양금동
양곡, 음지, 중지, 하리, 노천리(하로) 양천동 양천동  
  신기동    
양천동

이 고장은 김천시의 남쪽 고성산 동쪽에 펼쳐진 감천 냇가의 들을 안고, 한편으로는 고성산 남쪽 기슭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다. 동쪽은 감천을 사이하여 감천면과 이웃하고 남쪽은 산을 사이하여 구성면과 이웃한다.

양천동의 자연 부락은 상리·음지·중리·하리는 하로(賀老) 마을이다. 3번국도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고성산 남쪽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흩어져 있다. 새터는 시가지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3번국도변에 있고, 장승배기는 새터에서 남으로 3백m 지점 국도변에, 안정개는 장승배기에서 조마로 갈라진 4백m쯤에서 남으로 다시 갈려 들어간다.

상리·음지·중리·하리·새터·새동네·장승배기·안정개 등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다.

새동네는 병자년(1936) 홍수로 갈대가 유실되자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고가대면이었는데, 1914년에 모두 합하여 양천동이라 하고 감천면에 들게 하였는데 양곡(陽谷)과 노천(蘆川)에서 한 자씩 딴 이름이다. 1983년에 김천시에 속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양곡·음지·중리·하리가 있는 골짜기를 일괄하여 하로(賀老)라 했는데 3성의 사대부가 함께 사는 양반촌으로 3정승 6좌랑이 난 곳이라고 전해진다. 상리와 음지 중간 바른편에 옛날 와계동(臥溪洞)이 있어 ''애기''라 불렀고, 하리 마을끝 동쪽에는 동성동 (同盛洞)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여기 애기란 이름은 와계의 소리가 잘못 발음이 되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1) 신기동·새터·개울내기
    • 김천 시가지 남쪽 끝인 약수동에서 남으로 2km 떨어진 3번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 일제시대에 토매간이 생기고 주변에 형성된 마을로 하로에서 흐르는 개울가에 있기 때문에 개울내기·새터·신기로 불려지고 있다.
  • (2) 상리·양곡(上里·陽谷)
    • 신기동 3번 국도에서 남으로 갈리어 2km 지점에 있는 4개 마을은 반촌으로 하로(賀老)로 불려지고 있다. 양지바른 제일 윗마을은 양곡 또는 상리라 한다.
  • (3) 음지(陰地)
    • 하로의 양곡 아래에 있는 마을로 양곡에 대한 대칭으로 그늘진 마을이라 하여 음지로 불려지고 있다.
  • (4) 중리(中里)
    • 하로의 4개 마을 가운데 있다 하여 중리로 불려지고 있다.
  • (5) 하리(下里)
    • 하로의 맨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하로(賀老) 4개 마을의 중심마을이며 하로라 하면 이 마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 (6) 장승배기
    • 신기마을에서 남으로 2km 떨어진 3번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 장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에는 주막이 서너집 있었고 이곳에서 동으로 갈라지는 지방도로가 있는 데 조마면으로 연결된다.
  • (7) 안정계(安靖溪)
    • 장승배기에서 동으로 갈리어 지방도로 1km에서 다시 야산 언덕을 남으로 가면 300m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정무공(靖武公) 이호성(李好誠)이 안장된 곳이고 마을동쪽에 감천이 흘러 안정계가 되었다 한다.
  • (8) 새터
    • 장승배기에서 갈리어 조마면으로 가는 지방도로 300m지점 오른쪽에 있는 야산 동남쪽 아래에 노천리(盧川里)가 있었는데 병자년(1936) 수해로 유실되고 장승배기 남쪽 300m 떨어진 3번국도변에 마을이 옮겨졌다. 새터를 잡아 이름없이 내려오다가 새터로 굳어졌다.
  • (9) 하로(賀老)
    • 양천동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지던 하로는 당나라의 여지시랑 하지장(賀知章)이 늙어 벼슬에서 물러날 때, 왕이 감호일곡(甘湖一曲)을 준데서 연유하여 하지장의 옛 일에서 따다가 하로라 했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고려 말엽에 금산 안렴사였던 화순최씨 원지(元之)가 고려가 망하자 이곳 고성산 아래에 있는 구암사(耉岩寺)에 숨어 살면서 그의 세 아들과 손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최원지를 하례받은 노인이라 하여 하로라고 존칭한 데서 마을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황금동

동쪽은 감천에 이웃하여 있고 감천내 너머에는 지좌동이 있다. 남쪽으로는 고성산이 가로 막고, 북쪽으로는 모암동 용두동과 인접하여 자리한다. 조선시대에는 좌동과 우동, 약수동의 자연부락이 김산군 김산면에 속하여 있었다.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자연부락을 합쳐서 고가네마치(黃金町)라 불렀다가 광복 후 1946년에 와서 황금동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다. 1960년 황금 1동과 2동으로 나누었다가 1983년에 다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1) 좌동·우동(左洞·右洞)
    • 지금의 황금동 성당 앞을 지나는 길은 개울이었는데 개울 좌측편 성당이 있는 자연부락은 좌동이고, 우측편 언덕배기 마을은 우동이었다. 개운사로 이어지는 이곳 개울은 숲이 무성하여 호랑이가 출몰했다 하고, 청년들이 밤에 혼자 개운사 있는 지점까지 갔다 오는 일로 담력을 시험하는 내기를 했다 한다.
  • (2) 약물내기(藥水洞)
    • 황금동과 양천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골짜기에 항상 폭포같이 물이 흘렀는데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낮이면 남정네들이, 밤이면 아낙네들이 몰려 왔기에 이로써 불려 지는 마을이름이 약물내기다. 약물내기 국도변 양쪽에는 유기공장이 즐비했었는데 천안과 더불어 전국에서 유명했다. 지금은 도지정 문화재로 징이 남아 있다.
  • (3) 빗지걸
    • 황금동 시장 국도 동쪽편에 이름 모를 비가 섰고 비각이 있었다. 이 거리를 빗집이 있는 거리라 한 것이 빗지걸로 변했다.
  • (4) 자래밧골·자래동
    • 지금의 황금동 시장 남쪽 들머리의 국도 건너편 언덕은 풍수지리설로 자라의 형상이라 하여 자래등이라 하고 등 너머 골짜기를 자래밭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5) 방천뚝
    • 김천시의 동쪽을 꿰뚫어 흐르는 감천에 1917년 제방을 쌓음으로 해서 제방 따라 형성된 마을인데 방천뚝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방천뚝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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