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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재

대곡동

대곡동

1998년초 미곡동과 부곡동을 통합하여 대곡동이라 했다. 이 고장은 김천의 서북쪽에 부곡동 시가지와 이곳을 벗어난 농촌 마을이 인접하여 있고 서로는 대항면 대룡리와 인접하다. 또한 직지천을 사이에 두고 대신동(삼락동)과 마주본다.

대곡동을 조선시대, 1914년, 1983년, 1998년 순으로 나타낸 표입니다.
조선시대 1914 1983 1998
옥산동·본리·노증리(김산군 미곡면) 백 옥 동(금릉면) 미 곡 동 대 곡 동
구 신기·이로리(김산군 미곡면) 다 수 동(금릉면)    
부곡동·모지동·신기·원동(김산군 김천면) 부 곡 동(금릉면) 부 곡 동  
미곡동

조선시대에는 미곡동 관내에 있던 바깥새실이라고도 이르는 새실과 이로리(伊老里), 그리고 오늘날의 봉산면인 파며면의? 일부와 오늘날의 금산동인 군내면의 금평동(琴坪洞) 일부를 합하여 다수동이라고 하였다. 다시 지금의 옥산동인 새터와 노증 마을인 노증리(魯曾里) 오늘날의 본리인 내촌(內村), 그리고 군내면 금산동의 일부를 합하여 백옥동이라 하여 금릉면에 들게한다.

1931년에 김천읍, 1949년에 김천시 관할이 되기에 이른다. 1962년에 와서는 다수 1동과 2동으로 나누었다가 1975년에 다시 합치고 1983년에 다수동과 백옥동을 합하여 미곡동이라 했다가 1998년 미곡동과 부곡동을 합하여 대곡동이라 했다.

법정동의 이름과 그 유래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다.

  • (1) 다수동(多壽洞)
    • 경부 국도 길가에 있는 새실(바깥새실·구신리·신기) 마을과 이 마을에서 서남쪽 약 5백m에 있는 이로리로 구성된다. 새실은 2백 집이 넘는 마을이고 이로리는 경부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진 마을이다.
    • 두 마을 동쪽은 백옥동과 접하고 서쪽은 대항면 대룡동과 이웃하고 북쪽은 금릉평야가 펼쳐지고 남쪽은 덕대산의 지맥이 뻗어 가로 막은 농촌마을이다. 새실은 조선조 성종대에 시인 전만령(全萬齡)이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향지(17 27년)에는 미곡리로 나타난다.
    • 1914년에 새실과 이로리를 통합, 다수동이라 하고 1962년에는 1·2동으로 나누었다가 1975년에는 다시 합하고 1983년에 백옥동과 합쳐서 미곡동이라 했다. 미곡정사(微谷精舍)라 하여 성산(星山) 전만령선생을 기리는 재실(齋室)이 있는데 새실 뒤에 세웠으나 마을이 커지면서 마을의 끝이 되었다.
    •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① 새실·신기(新基) : 미곡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새로 생겼다고 해서 새실 또는 신기라 했다 하며 요즈음 이곳 에서는 품질이 좋은 포도가 많이 생산되어 이곳 주민들의 소득을 높여 주고 있다.
      • ② 바깥새실 : 새실 바깥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바깥새실이라고 했다 하며, 이곳도 전국에서 유명한 포도 단지로 품질이 좋은 포도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 ③ 이로리(이로리) : 미곡동 서쪽의 변두리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인데 임진왜란 때 두 노인이 여기에 피란와서 화를 면했다 하여 이로리라 불렀다 한다.
  • (2) 백옥동(白玉洞)
    • 새터·노증리·안새실 등 3부락으로 구성된다. 노증리는 4호, 국도 남쪽변에 있고 새터는 이 마을 남쪽 조금 떨어져 있으며, 안새실은 노증리에서 남쪽 1km 떨어진 오지에 있다. 마을 동쪽의 산이 옥녀봉(玉女峰)인데, 이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노증리와 새터의 북쪽은 금릉평야가 있고 남쪽은 경부선 철도가 동서로 지나고 있으며 철도 너머에 안새실이 있으며 안새실 뒤로는 산이 가로막았다.
    • 안새실이 가장 오래된 마을로 본리라 하고 새터가 뒤에 이루어진 마을이다.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이 마을에는 애인지(愛人池)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새터 마을 뒤에 있는데 본디는 예못(芮池)이라 하였다고 한다. 옛날 예(芮)씨가 나라에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하여 그의 집을 헐고 판 못이라고 전해 온다.
    •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① 노정리·노증리(魯曾里) : 옛날 금산군 광곡면의 자연 촌락 중의 하나였으며 처음에 마을을 연 사람이 노씨였다 하여 노증리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현재 백옥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 ② 옥산동(玉山洞) : 노정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는 옥산이 이 마을 근처에 있다 하여 그 산이름을 따서 옥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③ 새터 : 약 500년 전에 전만령이라는 사람이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노증리에서 갈려나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불렀다 하며, 지금도 전씨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나 각성이 모여 살며, 40여 가구의 마을로 특산물로는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 ④ 안새실 : 4호선 국도변에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안새실 밖에 없었는데 뒤에 이 마을을 본리라고 부르게 되고 도로 안쪽에 있다 하여 내촌으로도 불려 왔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부곡동

가매실은 동쪽으로는 평화동 시가지로 연결되고 고래실과 모지동은 4번 국도에서 각각 200m가량 남으로 들어간 곳에 자리한다. 원동은 시가지에서 남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깊은 곳에 자리하며 주공아파트, 현대아파트는 고래실 문지알(모지동) 중간 국도변에 있다. 남쪽은 고성산이 가로 막고 북으로는 금릉평야가 펼쳐지고 서쪽은 백옥동과 이웃한다. 국도에서 북으로 고속도로 진입로가 나고 금릉평야를 동서로 꿰뚫는 경부선 철도와 나란하게 철도 북쪽에 에둘러 가는 우회도로가 났다. 부곡동은 고래실·문지왈(모지동)·가매실·원골과 주공아파트·현대아파트 등의 자연부락과 아파트단지로 이루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원골은 김산군 김천면에, 이 밖의 마을들은 금릉면에 속했는데 1914년에 모두 통합하여 부곡동이라 하고 1962년에 1동, 2동으로 나누었다가 1983년에 다시 부곡동으로 합쳤다.

가매실의 가매는 '금'이고 신을 뜻한다 하여 옛날에는 한자로 부곡동이라 표기했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가매는 본디 신(神)을 이르는 신본위 중심의 사회에서 비롯하였으니,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물신과 땅신을 가리키는 지모신(地母神)을 이른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김천문화 발상의 샘이라고 할 감천(甘泉)의 '감'에서 갈래지어 나왔다고 풀이할 수 있다.

원골은 동구 밖에 남원이 있음에서 말미암았고, 모지동은 문지알 민지알로 불렀는데 1970년에 주공아파트가 들어섰고, 1991년에는 금류아파트·현대아파트가, 1995년에는 주공아파트 2차·3차가, 1999년에는 화성아파트·우방아파트가 세워져 부곡동은 아파트단지로 변모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1) 가마실·개미실·부곡(富谷)
    • 조선시대에는 천민계층의 집단 거주지인 굴곡부곡(屈谷部曲)이었는데 부촌을 만들자는 마을 사람들의 염원에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동명을 부곡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 지명에 가마가 들어가는 마을은 그 모양이 가마처럼 움푹 들어갔거나 큰 연못이 있어 농경시대에 먹거리 생산에 중심이 되던 곳을 이르는 일이 많았다. 감문국의 감-과 상당한 걸림이 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 (2) 문지알(聞知謁)
    • 고성산성 정상의 서북쪽에 옛날 봉수대가 있었는데 봉화가 올라가면 이를 본 주위 주민들이 영문을 몰라 서로 묻다가 봉화가 올라간 산 밑에 있는 마을에 가서 들어보면 알것이 아니냐 는 뜻에서 문지알(聞知謁)이란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문지알이 문잘·먼지알로 변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한문으로 모지동(毛之洞)으로 한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지금도 문지알·문잘·먼지알하면 인근 주민들이 잘 알지만 모지동이라 하면 잘 모르는 실정이다.
  • (3) 원골·원동(院洞)·원계
    • 고려 말에 길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이 설치된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원골·원동이라 했다 하며, 공산 송수필선생이 그의 문하생들과 여생을 지낸 원계서원이 있어서 원계라고도 했다 한다. 1914년 문지알(모지동)·신기동과 김천면 원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곡동이라 했다.
  • (4) 주막거리
    • 옛날에 말을 타고 대전이나 대구로 가는 가마실 길목에는 주막이 하나 있었다고 하여 이 마을을 주막거리라 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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