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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재

대신동

대신동

1998년 9월 금산동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김천시에서 가장 큰 동이 되었다. 시가지 북쪽의 직지천을 건너 외곽지대의 마을은 시청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행정 중심지로 변모하고, 대단위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공업의 중심지가 조성되었다.

음성나환자의 집단 거주지인 삼애원이 지명으로 굳어져 가고 있고 김천시민운동장과 문화예술회관이 건립되어 김천의 중심지로 발돋움해 가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지이던 금산동은 점차 쇠퇴해 오다가 이곳에 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서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다.

대신동을 조선시대, 1914년, 1983년, 1998년 1월 1일, 1998년 9월 1일 순으로 나타낸 표입니다.
조선시대 1914 1983 1998. 1. 1. 1998. 9. 1.
상리·중리·하리·금평
(김산군 군내면)
삼락동 금산동 금산동 대신동
교리·향동
(김산군 군내면)
교 동
문산리·당동·이(백)천리
(김산군 군내면)
문당동
금리·금신리·부거리
(군내면)
신음동 신음동 대신동
  삼애원
응전·독정리·괴동
(천상면)
응명동 대응동
공단동
대보리·묘광리
(개령현 서면)
대광동
  신곡동
신음동

시가지 북쪽의 직지천(直指川)을 건너 외곽지대에 자리한 농촌마을이다. 동쪽은 산너머 대응동 공업단지와 접하는 연결도로로 통한다. 남쪽은 직지천을 경계로 성내동·평화동 ·모암동 시가지와 인접하고, 서쪽은 외곽지인 금산동과 부춘산(富春山, 310m)을 경계로 인접하며 북쪽은 고개 너머 응명동과 닿아 있다.

자생 마을인 부거리·금신리·금음리는 서쪽에 부춘산을 등지고 경북선 철도변에 자리하였으며, 양계센터는 상주로 가는 국도 양편에 자리하고, 삼애원은 응봉 북쪽 기슭에 있는 음성나환자 마을로 양계를 주로 한다. 소꾸미는 직지천을 지나 선산으로 가는 길섶에 현대식 주택이 많이 들어서있다.

조선시대에는 부거리(富巨里)·금음리(琴音里)·금신리(琴新里)의 3개 자연부락이 김산군 군내면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 밖에 주막촌에 불과한 소꾸미가 있었다. 1914년에 이를 통합 신음동이라 하고 신설된 금릉면에 소속되었다. 1931년 금릉면이 김천읍으로 편입되고 1960년에 신음 1동과 신음 2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983년에 통합하였다.

광복 후에 천변부락(1953)·삼애원(1956)·양계센터 하단지(1967)·우시장(1967)·양계센터 상단지(1968) 등의 새로운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으며 공식적인 마을 이름도 없이 있다가 위와 같이 불려지게 되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1) 부거리
    • 약 3, 4백년 전 조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살아온 마을로 부춘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농을 하는 부자가 많이 살고 있다 하여 부거리라 하였다.
  • (2) 금음터·금음(琴音, 今音)
    • 약 3, 4백년 전 조씨가 처음 정착한 마을로 전성기에는 3백여가구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50여 가구로 작아진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있는 거문고 바위와 마을 입구의 부채 바위가 마주 보고 있어 바위에서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마을 이름을 금음 또는 금음터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3) 새트·새터·금신
    • 금음터 정착민들이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금음터를 떠나 새로 정착한 새로운 터라고 하여 새터·금신 등으로 불러 왔다.
  • (4) 소우미·소꾸미
    • 옛날 이씨 성을 가진 이가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로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소가 누운 형상이었고, 처음에 자리 잡은 곳이 아홉 골짜기의 끝으로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여 이 마을을 소우미·소꾸미라 칭하였다 한다.
  • (5) 삼애원
    • 1953년 3월 28일에 만들어진 음성한센병환자 집단 거주지로 현재 204세대가 축산(양계)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금산동

김천의 서북쪽 끝에 자리한 외곽지대 마을이다. 동쪽으로는 부춘산을 경계로 하여 신음동과 인접하였으며, 서쪽은 구봉산(九峰山, 269m)을 경계로 하여 봉산면 인의동과 인접하여 있다. 남쪽으로는 거문들이 펼쳐져 있고 그 앞을 직지천이 흐른다. 동으로 흐르는 내를 따라서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북으로는 구화산(九華山)이 가로막아서는 구읍과 구봉산이 가로막는 문당(文唐) 골짜기로 나누어진다.

옛적의 읍터이기도 하여 관아·객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삼락동과 교동, 그리고 문당동을 어우르는 행정동으로서 조선시대 초엽부터 삼락동에 금산관아가 있었으니 이르자면 김산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14년 자연부락을 각각 삼락동과 교동·문당동으로 개편하여 군내면 소속으로 하였다가 다시 금릉면으로 들게 한다. 이어 1931년에는 금릉면이 김천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0년에는 삼락동을 1동과 2동으로 나누었는데 1975년에 통합하기에 이른다. 1983년에 와서 위의 삼락동·교동·문당동을 합하여 금산동으로 부르게 된다.

법정동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1) 교동(校洞)
    • 동쪽은 부춘산을 경계로 신음동과 접하고 서쪽은 삼락동과 인접하는데 중간에 개울이 경계선이다. 남쪽은 평야가 펼쳐지고 마을 앞을 경부고속도로가 동서로 관통하고 고속도로 남쪽은 직지천이 흘러 부곡동으로 이어지며, 북쪽은 구화산이 둘러앉았다. 그 너머에는 대응동이다.
    •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군내면에 속하였던 바, 향교(鄕校)가 있다고 붙여진 교리와 향청(鄕廳)이 있어 붙여진 향동(鄕洞)이 있었다. 1914년에 교동이라 하고 금릉면에 속했다. 1931년 금릉면이 김천읍에 편입됨으로써 시 관할이 되고 1983년 삼락·문당과 더불어 통합, 금산동이 되었다.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는 김산향교가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1634년에 강설(姜渫)이 되세우고, 1973년에 이르러서 전교인 현경길(玄慶吉)이 다시 세웠다.
    •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김산골·동부·구읍·교동 : 옛날에 김산군 김천읍이 이 마을에 있었다 하여 김산골이라 불렀다 하며, 마을의 동서를 가르는 개울이 있어 서쪽 마을을 서부(지금의 삼락동)라 부르고, 이 마을은 개울 동쪽에 위치하여 있다 하여 동부라고도 하였으며, 1914년 개령이 김산에 통합되어 김천군 금릉읍이 이 마을에 있었기에, 전에 읍 행정복지센터가 있었다 하여 구읍이라고 불렀으며, 김산향교가 이 마을 동쪽에 소재하고 있어서 교동이라고도 부르다가, 1949년 8월 15일부터 법정동명이 되었다 한다.
  • (2) 삼락동
    • 동쪽은 개울을 사이로 하여 교동과 한 마을로 연접했다. 서쪽은 자연부락 금평이 1km쯤 떨어져 있고 그 서쪽은 구봉산을 분기점으로 하여 봉산면과 접한다. 남쪽은 거문들이 있고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북쪽을 가로 막은 구화산(311m) 아래까지 약 2km 정도 되는 앗골이 있다.
    • 조선 5백년 동안 읍터였던 삼락동은 명당이라 했다. 뒤를 병풍처럼 둘러막은 구화산이 마을 왼편으로 뻗어서 안으로 굽어 좌청룡을 이루고, 또 바른편으로 뻗은 지맥이 안으로 굽어 우백호를 이루었으며 앞은 활짝 열려 노서하전(老鼠下田)이라 하여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 오는 그 자세는 명당이라는 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구화산 들어가는 앗골 들머리에 상리가 있었고 연화지 부근은 하리, 그 중간에 중리가 있었는데 중리에 군아 동헌이 있었고 이를 군내리라고도 했다. 서쪽 떨어진 곳에 금평이 있어 이들 4개 부락이 군내면에 속했다. 1914년에 모두 통합하여 삼락동이라 하고 1960년에 상리·중리·하리·지역을 삼락 1동 금평을 삼락 2동으로 분동했다가, 1975년에 다시 삼락동으로 합동하였고, 1983년에 문당동과 합하여 금산동이라 하였고 1998년에 대신동에 통합되었다.
    • 이 마을에 전하여 오는 전설로는 여제단의 기자제와 애씨굴, 그리고 삼산이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여제란 떠돌이 귀신의 한을 달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인데 문산못 동쪽 뒤 산마루에서는 제사 지내는 여제단이 있었다. 여기서는 아들을 얻으려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때 "무자(無子)요!" 하면서 세 번의 절을 하였다고 한다.
    • 애씨굴은 애석굴(哀惜窟)이 변한 말인데 공설운동장 동쪽 석축을 쌓은 언덕배기에 있었다고 한다. 옛날 옥에서 죽은 아들이나 처형당한 이들의 주검을 이곳에 버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삼락(三樂) : 현 삼락동은 일반적으로 삼락 1동을 말하며, 오늘날 교동과 함께 구읍으로 불려진 마을로 고려 말에는 금산현의 관가를 두었던 곳으로 일찍부터 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읍의 삼락 지역은 앗골(앞골)·뒷냇골·옥골이었는데 이들 골에는, 옛날에는 작은 마을들을 이루고 있다가 마을이 번창함에 따라 상리·중리·하리라는 세 마을이 형성되어 그 규모가 커져서 한 마을을 이루어 삼락동이 되었다 한다. 앗골은 관가가 있었던 골이고, 뒷냇골은 마을 뒤를 흐르는 내가 있는 골이라 하며, 옥골은 중리골을 말하는데 옥이 있었다고 전한다.
        구읍이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에 앞내를 경계로 삼락동과 교동으로 구분되었는데 삼락동이란 이름은 세 마을(상리·중리·하리) 사람들이 화목하여 즐겁게 지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구읍의 향교에서 수학한 선비가 많고 맹자의 군자삼락지지(君子三樂之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이곳은 관아·사창·애씨굴(애석굴)이 있었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고 지금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 ② 거문들·금은들·금평(琴坪) : 마을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 남경양씨·장수황씨 양가가 오늘날 금호의 양지 바른 쪽에 자리 잡은 것이 마을의 시초가 되며, 마을의 지형이 마치 거문고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거문들이라 했고, 한자로 표기하여 금호가 되었다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조정으로 삼락동이 확대되어 거문들까지 포함되니 삼락 2동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금호 입구에는 사직터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거문들은 넓은 들을 뜻하는 현평(玄坪)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3) 문당동(文唐洞)
    • 삼락동에서 서북쪽 넓은 골짜기로서 약 1km 떨어진 곳에 문산리와 이에 이웃하여 백천리 (白川·梨川里)가 있고 여기에서 1km쯤 서북쪽에 당동(唐洞)이 있다. 이들 마을은 동으로는 넓지 않은 들이 있고 서쪽은 구봉산 지맥이 뻗어 이를 경계로 봉산면 인의동과 접한다.
    • 남쪽은 동쪽 앞들을 벗어나서 넓은 금릉평야가 펼쳐지고 북쪽은 구룡산이 가로막았다.
    • 백천(배천·이천)·문산·당동은 조선시대 군내면에 속했는데 1914년 통합하여 문당동이라 하고 금릉면에 들게 된다. 향지(鄕誌)에는 당동 위에 공덕동이 있었다고 했으나 알 수 없다. 1931년 김천읍에 편입되고 1983년에 이들 3개 동을 통합 금산동이라 했다. 자연부락의 이름 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당골·당동(唐洞) : 신라 말에 당나라 귀인이 이곳에 와서 살던 곳이라 하여 당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1930년에 문산과 당곡의 첫 글자를 따서 지금의 문당동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물론 당나라와 걸림을 두어 그리 표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 전역에 걸친 당골의 분포로 보아 성황당이 있던 곳을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② 문사이·문산(文山) : 조선 초기에 문산역이 이곳에 설치되어 역리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문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③ 배처이·백천(白川)·이천(梨川) : 옛날 이 마을 앞에 큰 내가 있었고 이 내 한 가운데 큰 배나무가 있었다 하며 마을 이름을 배처이·배천 또는 이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관직에서 물러나서 경렴당(景濂堂)이란 서당을 짓고 마당에 못을 파고 연을 심었는데, 그를 찾아 전국에서 선비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응동

이 고장은 김천시 북쪽의 변두리에 자리하였으며 북으로는 광덕산(廣德山, 228m)을 사이하여 어모면과 이웃하여 있다. 서쪽으로는 응봉산을 사이하여 신음동과 이웃하여 있다.

1988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80만평 규모의 공업단지가 이루어졌다.

자연부락인 묘광과 대보는 조선시대에 개령현 서면이었고, 1914년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광동으로 합치게 된다. 마침내 서면과 부곡면을 하나로 하여 개령면으로 들게 된다. 한편 매목·느티골·독정·아홉사리·새모산은 조선대에 김산군 천상면(川上面)이었는데, 1914년 에 합하여 응명동(鷹鳴洞)이라 부르게 되고, 다시 천상과 천하면을 합하여 아천면(牙川面)으로 들게 한다. 1928년에 와서 아천면과 구소요면이 합하여 어모면에 들기에 이른다. 1983년 대광동과 응명동을 합하여 대응동이라 이르고 김천시에 편입되었다.

법정동의 이름과 그 내력을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1) 대광동(大光洞)
    • 묘광·대보·신곡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지고, 광덕산을 배경으로 묘광과 신곡은 그 동남쪽, 대보는 등 너머 남쪽에 있고, 대보마을 앞으로는 공업단지가 들어섰다.
    • 묘광·대보는 오래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이었다가 1914년에 합하여 대광동이라 하고 개령면으로 되었고 1983년 응명동과 통합하고, 대응동이라 하여 김천시에 들게 되었다.
      • ① 대보(大洑) : 이 마을에는 높은 산도 없고 숲도 없어서 하천의 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리시설로서 큰 보를 막아 저수했다가 사용했으므로 대보라는 동명을 갖게 되었다 한다.
      • ② 묘광(妙光) : 약 360년 전에 전재일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묘광이라 이름지었다 하며, 금릉군 개령면 대광동에 속했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 구역 개편 때 김천시로 편입되었는데, 현재로 죽산전씨·밀양박씨가 많이 살고 있지만 각성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 ③ 신곡(新谷) : 과수원을 개발하기 위해 처음 집이 하나밖에 없는 외딴집이 들어섰으나 점차 이곳으로 이주 해오는 가구가 늘어나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개편으로 김천시에 편입되었다.
  • (2) 응명동(鷹鳴洞)
    • 김천시의 가장자리 삼애원(三愛園)에서 북으로 난 고개길 언덕 너머에 있고 마을 북쪽은 공업단지가 만들어졌다. 서쪽은 응봉이 가로막았으며, 아홉사리·새모산은 매목과는 멀리 떨어져 서쪽 산너머 3번 국도 길가에 외따로 있다.
    • 매목·느티골·독정·아홉사리·새모산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오래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천상면이었는데, 1914년 통합하여 응명동이라 하고 신설된 아천면에 속했다가 1928년에 어모면 소속이 되고, 다시 1983년에 대광동과 통합하면서 대응동이 되어 김천시에 들게 되었다.
    •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① 느티골·너투골·괴동(槐洞) : 옛날 이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느티나무가 있는 골짜기라고 해서 느티골·너투골로 부르게 되었으며, 한자로는 괴자와 동자를 써서 괴동(槐洞)이라 했다고 한다. 성산이씨들이 살고 있다.
      • ② 독정이·독정(獨井) : 독정이 또는 독정이라고 하는 맑은 샘이 이 마을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순흥 안씨가 많이 살고 있다.
      • ③ 아홉사리 : 마을 앞 서쪽은 구화산(九華山)이 가리고 있다. 구화산의 능선이 아홉개의 자름으로 이어져 있다고도 하고, 능선이 아홉개의 여우꼬리로 되어 있다고도 하는 등 구화산과 관련하여 붙인 이름이다. [김천시지(1989년 10월, 김천문화원) 발췌]
  • (3) 매목·응명(鷹鳴)
    •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이 매봉산(鷹峰山)이고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언덕을 깎아낸 잘룩한 곳을 통하게 된다. 그래서 매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매목이라 했다가 응명으로 고쳤다고 한다. 밀양박씨·진주하씨가 많이 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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