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감문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감문면

문무리 일원 문화유적

문무·송문 일원 문화유적 정비와 보존의 필요성

조상들의 슬기와 얼이 담긴 문무·송문 일원의 문화유적들을 체계적으로 정비·보존하여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시민들에게는 문화유산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문무리 일대를 개발하여 관광자원화 하고자 함

김천 역사의 뿌리, 감문국(甘文國)

감문국은 기원전후로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많은 읍락국가중의 하나로 신석기문화와 단절되어 새로운 청동기문화인이 외부에서 이동해 성립했다기보다는 토착민에 의한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본다. 김천지방의 경우에도 구성면 송죽리 감천변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고 같은 감천유역인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서도 동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지석묘가 집단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따라서 감문국의 건국주체는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감천유역에 산발적으로 집거(集居)하던 토착민 집단들이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상대적으로 유리한 생산기반을 가진 감천 중하류인 개령, 감문일대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통합, 흡수해 형성한 대표 읍락국가로 볼 수 있다. 우리 사서에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로 신라조(新羅條)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조에 “以伊湌昔于老爲大將討破甘文國伊其地爲郡” 즉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된 이래 모든 사료에 감문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3권 신해년(辛亥年) 신라 조분왕(助賁王)條에도 위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가을 7월 신라에서 이찬(伊湌) 석우로(昔于老)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쳐서 깨뜨리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우로(于老)는 내해왕(柰解王)의 아들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 이래 조선,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지도와 지리지, 향지에 감문국과 관련된 여러 사료가 등장하는데 특히 1682년 (숙종 21년)에 간행된 동여비고(東與備攷) 경상도좌우주군(慶尙道左右州郡) 총도(總圖) 금산, 지례, 개령 부분도에는 감문산을 중심으로 “二十里 甘文王 金孝王陵” 또 좌측으로 “七里 甘文王妃獐夫人陵 獐陵”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감문국 주변 유적 분포도

감문국 주변 유적 분포도

감문면 소재 감문국 문화유적

속문산성(俗門山城)
  • 감문면 문무리와 송북리 사이의 속문산(俗門山) 해발 600미터지점에 산정 능선을 따라 동북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되어 축조되었고 성북마을이 있는 동북쪽으로는 자연절벽을 그대로 활용했다. 확인된 성곽은 석축을 70cm정도 하단에 먼저 쌓고 그 위에 토성을 쌓는 방식이 주를 이루며 높이는 250cm, 길이 800미터에 달하는데 석성은 대부분 무너지고 현재 일부만이 남아있다. 성내 북서쪽 끝부분에는 둘레30미터, 지름10미터, 높이 5미터의 봉수대터가 남아있는데 지금은 무연고 묘지가 정상부에 들어서 있다. 군창지(軍倉址)로 추정되는 정상부 하단 평탄지에서는 지금도 무수한 와편(瓦片)이 산재해있고 건물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는 대형 주춧돌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속문산성에 관하여 “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 즉 “석축의 둘레는 2455척이고 높이는 7척인데 성내에 우물 2개와 못 2개, 군창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도 속문산성과 관련된 구절이 등장하는데 “在郡北四十里石築周二千四百五十尺內有二千二池” 즉 “군의 북쪽 40리에 있는데 석축의 둘레가 2540자이고 안에는 두개의 샘과 2개의 못이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속문산은 다른 이름으로 백운산(白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전설에 이르길 감문국이 신라에 망하게 되자 백성들이 속문산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하다가 급기야 몰살을 당하였고 그 원혼이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으니 이후 백운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속문산성의 성벽

고소산성(姑蘇山城)
  •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365미터의 고소산(姑蘇山), 일명 성산(城山) 정상부로부터 50여미터 아래에는 남북으로 길이 7백미터에 달하는 허물어진 석성이 남아있는데 멀리 속문산성과 마주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석성의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성벽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골짜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정밀하게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성인 감문산성, 토성과 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 달리 고소산성은 거의 대부분을 석재로 축성되었으며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옹성(甕城)이 있었을 가능성 등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이전의 축조방식과 달리 가공한 석재를 이용해 한층 견고하면서도 세련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정교성이 돋보이는 고소산성

금효왕릉(金孝王陵)
  • 감문국 왕릉으로 전해지는 금효왕릉은 궁궐지로부터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km떨어진 현재의 감문면 삼성리(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에 봉분높이 6m, 지름15m 크기로 김천지방에 남아있는 최대의 고분이다. 이 능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하는데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과 김천의 별호인 금릉(金陵)이 이 무덤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금효왕릉의 규모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하나 오랜세월 경작지로 잠식이 되어 전체적인 규모가 축소되었고 일제시대에 수차례 도굴이 되어 부장품의 존재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의미없이 말무덤으로 불리어왔는데 여기서 “말” 은 곧 “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보아야하므로 말무덤은 큰무덤 곧 수장(首將)의 무덤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금효왕릉에 관해 동국여지승람과 교남지에는 “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傳甘文金孝王陵” 즉 “현의 북쪽20리에 큰 무덤이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 고 적고 있다. 조선환여승람에는 “在谷松面三盛洞有大塚俗傳甘文國金孝王陵” 즉 “곡송면 삼성동에 큰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감문국 金孝王陵이라 한다”. 고 하고 또 감문국개령지에도 “이 陵은 甘文國금효왕릉이니 現 甘文面 三盛洞(舊 午盛洞下)에 있으니 只今은 雜草松木이 奔生하야 보는 사람의 안타가운 가삼을 鎭定할 수 없을만치 거치러웠도다” 라고 적고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옛무덤 거치러지고
    거치러진 풀이 요란하니
    아마도 금효왕 넋이
    편치 않은가 하노라

    금효왕릉

고분(古墳)
  •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묘제인 지석묘와 고분군이 산재해있는데 특히 감문면 문무리 마을주변과 야산에는 수십기에 달하는 지석묘와 훼손된 석실분이 집단적으로 분포되어있어 감문국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개령, 감문지방이 김천문화의 중심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지석묘

    노출된 석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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