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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남겨둔 마을이야기

지좌리 마을

언두봉 아래 부항천변에 위치했던 지좌리마을은 고려때 중문대장군을 역임한 벽진이씨 11세손 이성간이 이거한 이래 대대로 벽진이씨 집성촌을 형성한 마을이었다. 21세손 경암 이자홍이 1573년 벽진이씨, 연안이씨, 서산정씨, 이천서씨, 순천박씨 등 다섯 성씨, 12문중과 함께 조직한 십육현회에서 지은 정자 한송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좌리는 조선시대(철종 9년)때 정려를 받은 이영보 효자로도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마을을 형성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감천 연안의 홍수피해방지 등을 위한 댐건설 부지로 땅을 양보해 주시고 타지로 이주하셨으며, 10여가구만이 남아 댐상류 수변지역에 효아촌을 형성하고 있다.

신옥리 마을

신옥리 마을은 현 댐체 우안에 가까이 있는 마을이었다.

신옥리는 밤실이라 불리기도 했던 신소동과 남평문씨 순평공파 집성촌인 옥소동이 합해져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옥소동은 마을 뒷산이 풍수지리로 볼 때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다는 옥년산발형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지명을 따 구슬 옥(玉)자에 머리빗을 소(梳)자를 써서 옥소(玉梳)라 했다. 밤실은 예부터 밤나무가 많아 지어진 이름이라 하고 옥소동에서 분가한 후손들이 나중에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신옥소동(新玉梳洞)이라 했다가 줄여서 신소(新梳)로도 불렸다. 현재 댐체가 이 밤실마을에서 맞은편 마을인 지례면 문질까지 이르고 있다.

안타깝게도 마을을 형성했던 주민들은 옥소동 쪽 4가구만 남은 채, 감천 연안의 홍수피해방지 등을 위한 댐건설 부지로 땅을 양보해 주시고 타지로 이주하셨다.

도곡리 마을

댐과 댐공원으로 수용된 도곡리 문질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은 부항과 지례의 경계에 위치한 대문에 해당한다하여 문길(門吉)이라 했다 하는데 음이 변해 문질로 불렸다고 한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주 옛날에 이 곳에 큰 주막집이 있었다고 한다. 문질마을 주변에 살던 6가구는 감천 연안의 홍수피해방지 등을 위한 댐건설 부지로 땅을 양보해 주시고 타지로 이주하셨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사람들이 머물다간 옛주막과 그 흔적을 캠핑장과 예술촌이 있는 산내들공원으로 부활시켜 그 명맥을 잇도록 했다.

유촌리 마을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903지방도로변 비룡산 아래에 위치했던 유촌리 마을은 용촌, 동산(장터), 가물리, 버드내, 죽동, 새터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유촌이라는 지명은 인근의 유촌2리 버드내 마을 앞 하천변에 예부터 버드나무가 많은것에 유래하여 유촌(柳村)이라 했다한다. 용촌은 마을 뒷산인 비룡산(飛龍山) 아래에 위치한데 유래했다 하고 마을 앞 부항천변에 용머리 형상을 한 용두대 바위절벽이 유명한데 지금도 물이 빠질 때는 그 현상을 볼 수 있다. 동산은 비룡산 자락의 동산이라는 야산에 위치해 지명을 얻었다 하고 뒤에 이 마을에 장(場)이 서면서 장터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조금 떨어져있는 가물리(街勿里)는 부항천과 용두대의 절경을 노래한 조선시대 작자미상의 시 "倉然夜色 玲瓏傀石 月影徘徊 佳勿流暢 (창연야색 영롱괴석 월영배회 가물유창)"의 가물(街勿)에서 따왔다고 한다. 폐교된 유촌초등학교 뒤에는 예부터 대나무가 많아 죽동(竹洞)으로 불린 마을이 있었고, 마을뒤쪽에는 새로 들어선 마을이라 하여 새터(新攄)로 불리우는 마을이 있었는데, 풍수지리에 따라 앵서동(鶯棲洞) 이라고도 했다. 안타깝게도 마을을 형성했던 주민들은 감천 연안의 홍수피해방지 등을 위한 댐건설 부지로 땅을 양보해 주시고 타지로 이주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