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제 1 절 김천의 마을 이름과 감천

물이 흐르는 곳에 마을이 이루어지고 마을이 있는 곳에 인간 삶의 고리들이 이루어진다. 냇물은 높은 산 깊은 골짜기에서 돌부리를 올리는 작은 옹달샘에서 비하여 골에 골물이 합수하여 제 모양을 드러낸다. 때로는 굽이쳐 흐르고 더러는 곧게 흘러 내린다. 작은 시냇물이 합하는 곳에 삶의 모꼬지가 이루어지게 마련, 때로는 논을, 혹은 밭을 빚어내기도하면서 우리 삶의 텃밭을 일구어 주었으니 강은 참으로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라 하여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김천의 삶은 감천으로부터 온다. 감천은 김천 역사의 젖줄이며 말미암음이 다. 감천의 물줄기와 물줄기가 만나는 어름쯤에 먹거리 문화의 움이 싹터 올랐던 것이다. 그 싹이 자라서 숲을 이루고 마침내 황악산과 금오산이 용출하는 그 사이에서 감천의 물로 생명의 샘을 삼은 이들이 모여 사는 모꼬지가 된 곳이 김천이다.

감천의 뿌리샘은 대체로 우두령재에서 흘러내리는 샘줄기와 가목재에서 발원하는 샘줄가 부항과 지례의 어름, 상부리에서 만나 제법 물줄기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외감 내감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어우름은 물론이다. 물은 흘러 다시 구성과 김천 시내를 통과하면서 황악산쪽에서 발원하는 직지천과 만나게되고 다시 개령면에 이르러 어모천(禦侮川) 곧 아천(牙川) 과 만나면서 이제 감천의 본류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한자만 달랐지 어모는 곧 아천이 된다.

어금니아(牙)는 《훈민정음》에 따르면 엄소리(牙音)의 '엄'으로 대응이 됨은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하겠다. 그러니까 어모 - 엄이란 등식이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삼한시대에 감문국(甘文國)이 있었으니, 그 속국으로는 지금의 조마면에 있었던 주조마국(走漕馬國), 어모면 중왕리 자리에 있는 어모국(禦侮國), 감문면 문무리에 있었던 문무국(文武國), 아포면 제석리에 있었던 아포국(牙浦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한마디로 이들 나라들은 감천내가 만들어 낸 마을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감천내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고장이 김천이라고 보면 된다.

물이란 모여 들어 이루어진 것이요, 하늘이 내린 뭇 목숨살이들의 뿌리샘이다. 작은 샘들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더러는 연못이 되기도 하며 큰 내와 가람을 이루지 않던가. 하면 감천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말은 있으되 이를 적을 글자가 마땅하지 않아서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다가 썼던 시절이 있다. 이름하여 한자 차용시기라고 한다. 때로는 향찰로, 이두로, 구결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감천(甘川. 甘泉)의 경우도 그 적기를 보면 감(甘)은 우리말의 '감' 이란 소리를 한자의 그것과 대응시켜 적은 것이요, 천(川. 泉)은 한자의 뜻을 빌려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감천은 우리말 '감내' 란 말이 된다.

지역에 따라서 감내를 가무내(영양) 혹은 감내. 검내로 이르는 수도 있다. 적기에 따라서 강원도 횡성이나 충청도 유성에서는 갑천(甲川)이라 하며 그 지역의 속지명으로는 감내라고 이른다.

그러니까 감내 - 갑내 - 감천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쓰일 뿐 그 바탕을 이루는 뜻은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기원적으로 우리말 '감'이란 무슨 뜻인가. 이는 다름 아닌 신(神)을 이른다. 최남선의 《신자전》의 자료를 따르자면 모든 만물을 있게 한 존재자로서 이를 '검'이라고 하였는 바. '검'에서 모음이 바뀌면 감이 되기에 이른다.

하긴 농경사회에서 물과 땅이란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과 땅에 신격을 부여하였으니 이르러 지모신(地母神)이라고 일컫는다. 뒤로 오면서 사람의 슬기가 발달하여 신본위(神本位)의 신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발달한다.

이르자면 같은 말인데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이행되는 문화의 변이가 일어나면서 그 뜻이 바뀌었다고봄이 옳을 것이다. 단적으로 '감'이라는 말에서 신이란 뜻은 없어져 버리고 '중심'이라는 뜻으로만 쓰이게 된 것이다.

간추려 이르면 감천이란 중앙천이란 말이 된다. 과연 감천은 김천 지역의 중심이 될 만한가. 그렇다. 우두령과 대덕면 내감리에서 발원하는 냇물이 모여들어 감문면 태촌3리(배시내)를 지나 선산의 낙동강에 이르러 76km에 달하는 결코 짧지 않은 흐름을 통하여 김천의 온갖 삶터를 이루어 내었다고 하여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두 물줄기가 흘러 만나는 어름 전후하여 물에 흘러내린 모래가 쌓여 버덩이 생겨나고 그 언저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게 된다. 그럼 감천의 경우는 어떠한가. 먼저 가목재에서 발원하는 물들이 만나 모이는 곳에 가마목 곧 부항(釜項)이 생겼으며, 우두령재에서 흘러내린 물과 대덕면 외감.내감 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나는 곳 어름에 대덕면이란 보금자리가 이루어진 것 으로 보인다.

우두령재 쪽의 물과 부항 쪽의 물이 만나서 이루어진 어름에 지례와 구성, 그리고 농소면이 생겨났으며, 감천의 본류가 황악산에서 흘려내리는 직지천의 물과 만나는 곳쯤 하여 김천시가 큰 삶의 모꼬지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물은 흘러 다시 어모천과 만나면서 감천과 감문, 그리고 아포의 들로 이루어지는 김천 평야를 이루게 된다. 감천과 감문(甘文), 그리고 아포(牙浦)-엄개 의 '엄-어모'도 따지고 보면 감천(甘川)의 '감'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모두가 신본위 중심의 농경사회에서 물신이며 땅신이라 할 거북신 곧 검(감)을 숭상하는 믿음의 상징으로서 떠오른다.

구성(龜成)만 해도 그렇다. 거북이를 방언에서는 거명 혹은 더러는 거무(거미)라 함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보기라고 할 것이다. 그럼 지례(知禮)란 무엇 인가. 말 그대로 감 곧 신(神)을 모시는 예의를 차리는 곳의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예도예(禮)자도 글자 짜임을 보면 제단(示)에다가 제물을 그릇에 담아 놓은 모양(豊)을 어울러 만든 것이니 예의의 시원이야말로 신에게 감사와 풍년에의 기원을 바치는 행위를 들러냄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신라시대 231년(조분왕 2년) 석우로가 감문국을 토멸함으로써 신라에 병합 되었고, 주조마국은 이보다 약200년 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진흥왕 18년 (557)에는 감문국자리에 감문주를 설치하고 기종을 군주로 파견하였다가 진흥왕 36년(614)에 감문주를 폐하고 선산에 일선주(一善州)를 설치하여 금릉 지방을 그 차하에 두었다.

본디 이름이 동잠(桐岑)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산(金山)으로 고쳐 개령군의 영현으로 삼는다. 현종 9년(1018)에 다시 오늘날의 성주인 경산(京山)의 속현으로 만든다. 공양왕 2년에 이르러 감무(監務)를 두기에 이른다. 마침내 1295년에 와서 다시 상주에 속하게 된다.

우리말을 적을 때에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다가 쓴다고 하였는 바, 먼저 '감-'의 소리와 걸림을 보이는 고장의 이름을 들어 보도록 한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보기가 감천면과 감문면이다. 같은 계열에 드는 경우가 대덕면의 외감(外甘)과 내감(內甘)이라고 하겠다.

감문면의 경우는 감천내에 면하여 이루어진 고장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감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감문(甘文)은 옛 기록에도 나오는 바, 감물(甘勿) 혹은 금물(今勿)이라고도 적힌다. 감-금-검은 같은 뜻을 공유하는 형태로서 그 바탕은 중앙이요, 기원적으로는 지모신임은 앞에서 이른 바와 같다. 한자 자전을 보면 우물 정(井)의 정(井)에서 아래 획들만 없애면 그 모양이 거의 감(甘)자와 비슷하게 된 다. 결국 삶의 중요한 요건 가운데 하나가 물이요, 내(川)란 말이 된다. 때로 는 낙동강에서 감천내쪽으로, 더러는 그 반대로 배가 들락날락하면서 수운을 발달시켰으며 삶에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풀어 나갔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김천(金泉)이란 고장의 이름이다. 김천의 옛 고을 이름이 감물(甘勿)인데 이는 달리 금물(今勿)이라고도 적었다. 글자만 달랐지 감-금이 같은 의미를 드러내는 고장의 지명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천이 감천이요, 감천이 낳은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줄거리가 된다.

적는 한자나 그 소리는 다르지만 잘 살펴서 그 대응성을 알아보면 난함산 (卵含山)의 함(含)또한 감천의 '감(甘)'과 같음을 알 수 있다.

'함'의 도대 한자음이 감(甘γam)이니 난함산을 우리말 식으로 읽으면 알감산이란 풀이가 가능하다. 소리가 약해지면서 난함산-나남산-내남산으로 그 소리가 여러 가지로 바뀌어 일반화되어 쓰인다. 알감산에서 상금천 곧 감천 의 큰 지류인 어모천 상류의 한 갈래가 알감산에서 흘러 모두가 감천으로 합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감천과 걸림을 보이는 방사형태라고 상정할 수가 있다.

어모면(禦侮面)과 어모천, 그리고 아포(牙浦)의 경우도 그 예외가 아니다. 《대동지지》를 따르자면 금산의 옛 이름이 어모(禦侮)였음을 알 수가 있다. 어모는 한자로 적혀 있으나 기실은 어머니에 대한 김천의 방언으로 적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니까 감천에 어머니 신격을 부여하던 그 시기에 거북 신앙과 물 신앙이 한데 어우러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이르러 1398년에 김산현의 황악산에 정종의 태를 봉안하고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별호를 금릉(金陵)이라 하여 어모현을 폐합하였다. 1601년에 아포에서 역모가 있어 개령현이 김산군에 폐합되었다가 9년만에 복원 되고, 1629년에 김산군에서 다시 역모가 일어나 김산군은 김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1년만에 복원되기도 했다.

1906년에는 김산군의 연명면을 개령군으로, 김산군의 황금소면을 충북 황간군에, 충북 황간군의 남면과 성주군의 신곡면을 김산군으로 각각 편입시켰다.

1914년 3월 군면 폐합에 따라 김산군. 지례면. 개령군 일원과 성주군 용산면 신곡동 일원을 통합하여 김천군으로 개칭할 때 김천면이 확대되어 김천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시가지역인 감천면은 상신기. 하신기. 성내. 좌동. 우동. 원동. 중동. 하동의 8개 동을 다스렸다. 그 후 1920년에 다시 김천면이 특별면으로 지정되어 자체 예산으로, 감천 제방공사를 완성함으로써 여름이면 홍수로 철시하여 오던 신기 장터 근처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1931 년 4월 1일 김천 특별면은 금릉면(신음. 삼락. 교동. 문당. 백옥. 부곡. 다수의 7개 동)과 감천면의 지좌동을 병합하여 김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34년 구소요면과 아천면을 통합하여 어모면으로, 과곡면과 석현면을 구성면으로 통합하였으며, 곡송면과 위량면을 감문면으로 통합하여 1읍 15면을 관할하였고, 1938년 감천면과 지좌동을 김천읍으로 편입시켰다.

광복 후 1946년 일본식 땅이름을 우리말식 지명으로 변경함에 따라, 욱정을 감호동, 본정을 용두동, 금정을 모암동, 대화정을 평화동으로 고치고, 성내정. 황금정. 남산정은 정(町)을 모두 동으로 고쳤다.

1949년 8월 13일 김천읍이 김천부로 승격되고, 같은 해 8월 14일 김천부가 김천시로 변경되어 김천시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김천군에서 금릉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52년 4월 25일 면의원이 선출되고 면의회가 구성되었다.

1983년 2월 15일 감천면 양천동, 어모면, 응명동, 개령면 대광동, 농소면 덕곡동이 김천시에 편입되고, 감문면 봉남동과 소재동이 선산군에 이관되었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었고, 1991년에는 금릉군이 자치단체로서 선거를 통하여 군의회가 구성 되었다. 1995년에는 금릉군이 김천시에 통합되고 1998년에는 13개동이 8개동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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