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배서리

연실(蓮實)마을은 옛날 '배서리'라고 했는데 마을 안에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고 한다.지금도 멀리 떨어진 들판에 옛우물이 그대로 있다.

화조대

인 4리는 황소(凰巢)마을인데 조선시대에 마을 한가운데 '화조대'가 세워 졌다. 이때부터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담배도 금하고 옷깃을 여미고 지나가고, 불미스런 행동을 한 사람은 멀리 돌아서 갔다고 한다. 여기서 화조는 과거에 급제하면 나라에서 내리던 꽃으로 만든 화관을 말한다.

제지(祭地)

날 장씨(蔣氏).장씨(將氏) 두 장사가 천근이 넘는 바위를 들어다 마을 복판에 놓고 돌방아를 만들어 이웃 사람까지 방아를 찧게 하였으므로 그 방앗간 앞에 공덕비를 세우고 죽은 뒤에도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 자 리를 지금도 제지(祭地)라고 부른다.

정록(鄭祿)골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세마라는 사람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나 묘 자리를 찾는데 나라에서 띄운 연이 떨어진 곳이 명당이라 하여 그곳이 구암(九岩)마을 앞 정씨의 산소가 되었고, 지동(智洞)마을 북쪽들은 그 에게 녹(祿)으로 내린 땅으로 정록골이라 한다.

함골(函谷)

대신 대동마을 동쪽의 산은 움추린 개의 형상이고, 감천 건너 개령면 동부리의 마주 보이는 호두산은 호랑이 형상이어서 개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형국의 지형이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이 마을을 함곡(陷谷)이라 한것이 함곡(函谷)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깐치알

작동(鵲洞) 마을 뒷산이 까치형이라 하고 마을회관 앞에 조그만한 동산이 있어 깐치알(까치알)이라 했는데, 부녀자가 이곳에 오르면 까치알이 깨어져 마을이 망한다고 했다.

길지(吉池)

제석리(吉云節)에 사는 길운절이 제주도에 건너가 역적모의 하다가 잡혀 그가 살던 곳에 집을 헐고 못을 팠는데 이 못이 길지이다. 모의를 하면서 탄로날 것을 염려해서 모의와 고변 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탄로 직전에 고변쪽으로 기울어 고변했다. 고변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좌죄만은 면했으나 나라에서 길운절이 살던 집을 헐고 못을 팠는데 이를 길지라 한다. 이 때문에 개령현이 폐현되기도 했다.

제석동의 국가설
  • 삼태봉<三胎峰>은 옛날 왕자의 태가 묻힌 곳이라 하고 '아노금골'은 옥이 있었다고 한다. <감문지(甘文誌)>에는 감문국 세력권에 있는 아포가 반란하였을 때 30명 군사를 보내어 진압하려다가 감천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했다고 했다.
  • 반남박씨가 조선시대 초기에 이곳에 정착하여 석성을 쌓았다고 구전되는데,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이곳은 삼한시대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 한문안골 : 반남박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여 석성을 쌓고 성문 하나를 내어 한문안골이라 했다. 이러한 전설은 제석리가 아포국의 수도였음을 시사한다.
포구나무걸

제석2리(남촌)마을 서쪽 연봉천 가까운 길옆에 5백년 묵은 포구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이 서울과 부산간의 중간 지점이었다 한다.

한지(韓池)

송천 3리 대지마을은 큰못인 한지가 있어 불려진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살던 한(韓) 판서의 아들 8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 안에 명성이 높아지자 아들들이 역적 모의나 할까 두려워 한 판서는 자기 집을 헐고 못을 팠다. 지금은 매립하여 주거 단지가 되었다.

석상(石像)

송천 1리 숭산(崇山)마을 앞 못뚝에 홀(笏)을 안은 2기의 석상이 있다. 경상도 어딘가에 있는 숭산이란 곳으로 이 석상을 운반해 가던 중 숭상이 아니었던 이곳을 숭산이라 하는 바람에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곳에 두고 갔다 한다.

앞숲

송천 3리 금계(金鷄)마을 앞에 노송나무가 우거진 1정보 가량의 숲이 있다. 이 마을은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인데 앞이 트여 알을 깔 수 없어 우환이 잦다 하여 3백년전에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땅을 사들여 숲을 만들어 알을 순조롭게 까게 했다고 한다.

삼자암(三者岩)

대성 1리 마을 앞에 넓고 편편한 바위가 있다. 옛날 개령.선산.인동 세 고을의 수령들이 이곳에 모여 강론하고 화합한 곳이라 하여 삼자암이라 하고, 성자들이 모였다 하여 마을 이름은 회성(會聖)이라 했다 한다.

온수(溫水)

대성 2리 온수마을 남쪽끝에 우물을 팠더니 더운 물이 솟아 식수로 쓰지 않고 해마다 이곳에서 지신제를 지냈다 한다. 지금도 온수정(溫水井) 이라 불리우면서 보전되고 있으나 온수는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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