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개령면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이 이곳에 있었으며, 서기 231년에 신라에 병합되고, 557년에 감문주를설치하여 기종을 군주(軍主)로 파견했으며, 687년에는 사벌주 밑에 개령군을 두고 그 밑에 감물현(어모현). 지품천현(지례현). 무산현(무풍현). 김산현을 두었다.

조선시대(1416년)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면서 개령현으로 격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동부동 일대에는 왜군의 후방 사령부가 설치되어 영남지방의 행정에까지 손을 뻗쳤다 한다. 1601년에는 길운절(吉云節)이 제주도에서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그가 살던 개령현이 폐현되었다가 1609년에 유림의 상소로 복현되었다. 1869년 전국에 13도를 두면서 개령은 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개령군에 속한 부곡면(7동)과 서면(11동)을 통합하여 개령면이라 하고 18동리를 9동으로 개편했다. 1983년에는 대광동이 어모면 응명동과 합하여 대응동이 되어 김천시에 편입 되었다. 김천시의 동북쪽에 감천을 따라 장방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김 천시내에서 면 소재지까지 8km 떨어져 있다. 동쪽은 감천을 경계로 아포읍, 서쪽은 어모면, 북쪽은 감문면, 남쪽은 김천 시가지와 접하고 있다. 김천 시가지 동북에 인접하고 동북으로 흐르는 감천을 따라 길게 뻗으면서 감천 연변의 넓은 평야를 안고 있는 지대이다.

옛날 감문국이 자리한 곳으로 유적지가 비교적 많고 910번 지방도로가 남. 동북으로 뻗었으며 산지보다 평야가 더 많은 편이다.

황계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에 속한 황경동인데, 1914년 4월 행정구역을 대폭 폐합함에 따라 오송과 합하여 황계동이라 하여 서면과 부곡면을 통합한 개령면에 예속되었다가 1988년에는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황경. 오송의 두 마을은 개령면 최남단으로 대광동과 접하고, 남. 동. 북 3면에 감천연변에 발달한 노전들. 은지들이 펼쳐지며, 들 가운데는 동북으로 910번 지방도로(김천 - 선산)가 지난다. 개령면 소재지와는 5km 거리인데 남쪽에만 낮은 구릉이 두 마을을 막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행경골. 황경(黃京). 황경곡
    • 1805년 김명한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큰 들판을 낀 고을이고 황토가 많다고 하여 황경이라 했다 하며, 이것이 변하여 오늘날에는 속칭 행경골이라 부르고 있다.
  • ② 오송골. 오송(五松)
    • 황계리 서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임진왜란 때 이곳에 큰 소나무 5그루가 있었는데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피난을 하면 안전하다는 설이 있었다 하며, 그 때부터 마을 이름을 오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③ 구내주막
    • 지금의 번개들 중에서 약 60ha가 옛날에는 냇바닥으로 되어 있었고 들 위 부분에 있는 주막자리가 옛날에는 냇가였기 때문에 구내주막이라 불렀다 한다.
    • 황계동의 입구인 동시에 번개들이 중심으로 농부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으며 현재 김녕김씨 한 가구만 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신룡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에 속한 상신. 중신이었는데,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하여 행정구역을 대폭 폐합함에 따라 오룡동과 폐합하여 신룡동이라 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변경했다. 옛날 중신 남쪽에는 하신 마을이 있었는데 없어졌고 농경지로 변했다.

개령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4.5km 떨어진 야산지대로 두 마을(상신. 중신)로 이루어지고 초등학교가 있다. 동쪽은 은지들이 있고 구야로 가는 군도(김천 - 감문)가 지나며 서부리와 접하고, 서쪽은 광덕산(200m) 지맥이 가로막아 어모면과 접하고 남쪽은 황계동, 북쪽은 오룡동과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곰내기. 웅락(熊洛)
    • 약 500년 전에 라천(羅天)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앞 산의 모양이 곰이 머리를 내민 것 같다 하여 곰내기라 이름지었으며 한자로는 웅락이라 썼다.
    • 또 마을을 나누어서 중심 되는 마을을 상신, 남쪽 마을을 중신, 상신의 아랫마을을 하신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룡동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 어모면의 능치. 능점과 함께 모두가 곰토템을 드러내는 곰숭배 - 조상숭배를 하던 관습이 지명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농경문화시기로 접어들면서 이는 거북 - 검(감)으로 바뀌어 쓰이게 된다.
  • ② 오룡골(五龍谷)
    • 신룡리 중에서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 1000년 전에 해주오씨인 한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 5개의 능선이 마을을 향해서 뻗어 있고 그 밑에 천연적인 못이 있다 하여 오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덕촌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에 속한 덕림동이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 후 총독부령에 의하여 행정구역을 대폭 통합함에 따라 산당. 자방과 통합하여 덕촌동이라 하고 신설된 개령면에 예속되었다.

1971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촌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개령면 서단에 위치하고 면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마을이다. 터골과 독송의 두 마을이 어모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동쪽은 감문산을 경계로 동부리와 접하고, 서쪽은 덕촌 분지를 벗어나면 어모면의 넓은 들이다.

남쪽은 은지들 끝 쪽으로 신룡리로 이어지고 북쪽은 취적봉(300m)이 막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터골. 기동. 대촌
    • 덕촌리의 중심 마을이며 임진왜란 때 함안조씨가 이곳을 개척하면서 마을터를 잡았다 하여 기동 또는 대촌이라 했다 하나 지금은 보통 터골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36여 가구에 함안 조씨. 금성나씨. 밀양박씨 등이 주로 살고 있다.
  • ② 독술. 독송(獨松). 약송
    • 덕촌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100년 전에 이 아무개란 선비가 이곳을 개척할 때 마을 뒷산이 독수리 모양이며, 당시 대단히 큰 소나무가 서 있었다 하여 독수리와 소나무란 뜻을 합하여 악송이라 부르기도 했고, 고립송이라는 뜻으로 독송이로도 불렀으나, 지금은 속칭 독슬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며 약 30여 가구에 김성나씨. 흥양이씨 등이 살고 있다.
  • ③ 산당(山堂)
    • 덕촌리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박 아무개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집들이 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산당이라 불렀다 한다.
    • 마을에 산당이 있어 불러진 마을 이름일 것이다.
  • ④ 자방(紫方)
    • 덕촌리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1480년경 오식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에 실 짜는 방이 있었다 하여 자방이라 불렀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서부리

본디 부억리. 화목리. 우량리(죽전리)의 세 마을인데 마을이 커지면서 한 마을이 되었고, 조 선시대에는 개령현 서면에 속했는데, 1914년 통합하여 서부동이라 하고 개령면에 예속시켰다. 1988년에는 동이 리로 바뀌었다.

개령면 소재지 남쪽에 호두산 밑으로 길게 늘어진 마을로 동쪽은 감천변에 발달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남북으로 910번 지방도로(김천 -선산)가 지난다. 동쪽은 감천 넘어 아포읍 대신리가 바라보이고, 서쪽은 호두산이 가로막고 우량동(죽전동) 뒤에는 죽림이 무성하고, 북쪽은 동부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버어골. 벅골. 백골. 버골. 안동네. 부억골(夫億谷). 부엌동
    • 현재 동 행정복지센터 서쪽 산 안쪽의 위편 마을로 고려시대 경모씨라는 선비가 개척하였다 하며, 주민들의 생활이 넉넉하여 부엌동이라 불리어 왔다 한다. 60여 가구에 김해김씨. 수원백씨. 안동권씨와 이씨. 손씨 등이 살고 있다.
  • ② 하몰골. 하묵골. 하먹골. 하목골. 화목동(和睦洞)
    • 서부리에서 중심되는 마을로 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동쪽으로 뻗쳐 있으며 이웃과 친척 사이에 화목하게 지낸다 하여 화목동이라 불렀다 하며 이씨. 김씨. 문씨 등이 35가구 정도 살고 있다.
  • ③ 우랑동. 우량동(友良洞)
    • 주민들의 수준이 높고 좋은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화목동 동쪽에 위치한 마을 로 문씨. 전씨. 박씨. 윤씨의 7가구가 살고 있다.
  • ④ 죽전동(竹田洞)
    • 화목동 북편에 있는 마을인데 오늘날도 마을 뒷산에 대나무 밭이 많다. 대나무를 심은 연대는 알 수 없고 죽전동이란 마을이름은 대나무가 유달리 많아서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10여 가구이며 김해김씨. 임씨. 박씨. 문씨 등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다소 높은 지대인 마을 중심 부분에 우물이 있어 오늘날도 많이 이용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동부리

삼한시대에는 감문국이 이곳에 있었고 신라시대에는 감문주. 개령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의 중심지로서 부곡면에 속한 화전리. 교동. 구교동이었는데, 1914년에 통합하여 동부동이라 하고 신설된 개령면에 편입되고, 1971년에 교동을 중심으로 한 비석걸. 화전리(옥전리). 와호동을 함께 나누어 동부 1동으로 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개령면 소재지로서 여러 기관들과 중학교가 있으며, 김천 시가지에서 8km 쯤 떨어져 있다.

10번 지방도로(김천 - 선산)가 남북으로 뻗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동쪽 마을 앞은 넓은 들이 펼쳐지고 감천이 흐르고 강을 건너 아포면과 평야로 이어진다. 남쪽은 서부리가 가깝고 서쪽은 감문산이 막았으며 북쪽은 가까이에 양천리와 이웃한다. 삼한시대 감문국이 있었던 곳으로 김천시에서 유적지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윗마을. 윗골. 조동. 교동. 교촌(校村)
    • 오늘날 향교가 있는 마을로서 한자어인 교동을 속칭 조동이라 부르며, 이 교동 맞은편 산이 마치 호랑이가 오른쪽으로 누워 잠자는 형상이라 하여 호두산이라고 하는데 이 호두산 윗줄기인 감문산 중턱에 계림사라는 고찰은 신라 눌지왕 3년 아도 화상이 산세를 진압시키려고 창건했다고 한다.
  • ② 옥전동(玉田洞)
    • 옥지기들이 경작하던 밭으로 생각되는 동부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7가구에 진주강씨. 경주 이씨가 주를 이룬다.
  • ③ 정변동(井邊洞)
    • 동부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단위 농협 남쪽 창고 앞쪽에 샘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며 10여 가구도 안되는 조그마한 마을로 김해김씨. 경주이씨 등이 살고 있다.
  • ④ 조천. 구교(舊校)
    • 원래 동부 2리 관학산 중턱에 있었는데 1837년 개령현감 태두남이 감문산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전의 향교 자리는 지금 구교(舊校). 교천(校遷) 또는 조천으로 부르고 있다. 그곳에 유정승의 묘라고 전해지는 묘가 있는데 유성룡의 후예로 명문가의 묘를 쓰기 위해 향교를 헐었다 하나 믿을 수 없다. 지금은 성산배씨. 김해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양천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부곡면에 속했는데,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하여 신설된 개령면에 예속되고, 1988년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개령면 소재지에서 500m쯤 북쪽에 있고 김천시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끼고 있으며, 동쪽에 감천이 북류하고 천변을 따라 910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서쪽은 취적봉(300m)이 막고 있고, 북쪽은 광천리, 남쪽은 동부 2리와 인접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역말. 양천. 양천역(楊川驛)
    • 감천 냇가의 수양버들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양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도 이 마을 앞 감천변을 따라 큰 수양버들이 많아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되며 양천리 중앙 부분에 조선 때 김천 도찰방에 딸린 양천역이 있었는데 고종 건양 원년에 혁파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광천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부곡면에 속한 광한이었는데, 1914년에 횡천과 합하여 광천이라 하고 신설된 개령현에 들게 되었다. 1971년에 광한을 광천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바꾸었다.

개령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1.7km쯤 떨어져 동쪽 감천변에 넓은 광천평야를 낀 평야지대 에 있다. 감천 따라 910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남쪽은 양천리와 접한다.

서쪽은 낮은 산이 뒤를 막고 북쪽은 남밭 골짜기를 사이로 광천 2리(황천)와 인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광어이. 광한(光汗)
    • 병자호란 때 안련이란 사람이 비통히 여겨 개령 광한리로 낙향하여 들이 넓고 내도 광할하다고 붙인 지명이라 하며, 방언으로 광어이라고 하는데 70여 가구에 순흥안씨들이 주로 살고 있다.
  • ② 빗내. 큰마. 횡천(橫川)
    •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에 비켜 흐르는 내가 동네 앞으로 흘러서 빗내라고 했다는 이야기와 동네가 감천에 비스듬히 있다고 빗내라고 한다는 설도 있으며, 새마와 중마를 구별되게 하기 위해 큰마라고도 부른다. 빗내 농악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감천의 흐름이 마을에서 보면 빗겨 흐르는 모습으로 보아 그리 붙인 것으로 보인다.
  • ③ 새마.주막거리
    • 빗내 앞에 있는 마을로서 처음에는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 했으나, 그 후 주택이 늘어남에 따라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에서 새마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남전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부곡면에 속했는데, 아랫마(하촌). 웃마을(상촌)을 물로동이라 했다. 1914년 총독부령에 의하여 못안 불당골까지 합쳐서 남전동이라 하고 개령면에 예속시켰다. 1988년에 동이 리로 개칭되었다.

개령면 중앙에 자리하고 면소재지에서는 3km 떨어지고 먼 곳 대양묘까지는 6km떨어져 있다. 동서로 길게 골짜기를 이루고 남북은 산이 가로막아 협곡을 이루었다. 동으로부터 못안. 아랫마. 웃마. 불당골. 대양묘의 5개 부락이다. 못안에서 대양묘까지는 5km쯤 되고, 관내 4개의 못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남밭. 남전(藍田). 물로동(勿老洞).물로리. 불로리. 적전(赤田)
    • 원래 물로동이라 불렀으나 소년들이 잘 죽어 조선시대에 남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며, 산에 나무가 적어 적전이라고도 불러지며 신선이 놀던 곳이라 하여 물로리 또는 불로리라고도 불려져 오고 있다.
  • ② 웃마. 상촌(上村)
    • 남밭내(川)에서 위쪽에 위치한다고 웃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늘날 포도. 복숭아 등 산지 과수를 많이 심어 부촌으로 가꿔 가고 있다.
  • ③ 아랫마. 하촌(下村)
    • 남밭내(川)에서 아래쪽으로 위치한다고 아랫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근래에 자두밭. 포도밭 등을 많이 조성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선산김씨들이 주축이 되며 이씨. 송씨 등의 각성이 있으며 고풍의 풍습이 많이 남아 있고 인심이 좋은 마을로 손꼽힌다.
  • ④ 못안. 지내(池內)
    • 마을 앞에 못이 있다고 하여 못안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못은 면적이 4000여 평으로 모든 산세와 지세가 이곳에 모이므로 나라에서 역적이 난다고 광산김씨의 소유인 땅을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못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10여 가구인데 주로 일선김씨가 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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