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구성면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남쪽끝인 하곡. 강성. 신기. 관동. 황각. 죽방. 대방. 수동. 송평. 궁장 등 10개 마을로 이루어지는 과곡외면과, 금곡. 두곡. 상기. 중기. 하기. 래방. 배평. 광천 등 24개 마을로 이루어지는 과곡내면이라 하였다. 지례현 북단인 임평. 무릉. 임천. 월평. 임규. 단수. 마산 등 14개 마을은 상북면에, 구미. 작내. 복호. 와룡. 상거. 명덕. 대림. 미평 등 24개 마을은 하북면으로 편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곡외. 과곡내양면을 과곡면으로 통합하고 상북. 하북면과 대항면의 백어를 합하여 석현면으로 하였다가 김천군에 편입되었다. 1933년 홍수로 석현면 청사가 유실되자 과곡. 석현면을 통합하여 구성면이라 하고, 1934년 상좌원에 청사를 신축하였다.

구성이라 함은 지례현의 옛 별호를 따온 것이고 광복 후 1949년 김천읍이 김천시로 승격 되어 분리됨에 따라 금릉군으로 예속하였다. 1988년 조선시대 금릉군 관내에 있던 동을 리로 바꾸었다. 김천시에서 남으로 1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김천시 양천동과 경계를 이룬다.

동쪽은 지례면, 서쪽은 부항면, 서북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충북 영동군과 접한 산간 지대이다. 북쪽은 덕대산(811.6m)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국사봉(570m)과 삼악산(454m)을 이룬다. 남동쪽으로는 가제산(682.7m)이 위치하며, 삼도봉과 우두령에서 발원한 감천이 면 중앙부의 남북으로 관류하며 그 유역이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다.

질매재에서 발원한 무릉천(5.25km)은 구미에서 감천내와 합류하고, 대항 주례에서 흘러내리는 하원천(9.25km)은 상좌원에서 감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덕대산 남동 기슭의 끝부분인 석현(돌고개)은 조선시대 김산군. 지례현의 접경을 이루었다. 구성의 구(龜)는 감천의 속성을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인 이름이다.

구성산성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연못 가운데 거북이 바위 전설이 있어 거북이와의 인연이 깊은 고장이라 할 수 있다. 거북이를 사투리말로 거무 혹은 거미라고도 이르는바 모음이 바뀌면 거미(거무) - 가미(가메, 가매)의 대응됨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물을 중하게 여기는 물신숭배의 믿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굼뜸이라 하여 거북이 구멍같이 생긴 고장에서 마을 형성이 비롯하였음을 일깨워 주는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다.

하강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한 하곡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곡. 강성. 신기를 통합하여 하강동이라 하고, 과곡면에 속했다가 1934년 과곡. 석현면이 신설된 구성면 소관이 되었으며, 1971년 하곡. 신기를 하강 1동으로 분동하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면 소재지에서 동북으로 9km 거리에 위치하며, 김천시에서 남으로 6km 지점에 있고, 3번 국도가 동남으로 통하고,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신기마을이 있다. 남동으로 낮은 재를 넘으면 조마면 신안리이며, 서북엔 하강 2리와 이어지고, 남으로 대방령 - 대방이재를 넘으면 송죽리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모리이. 신기(新基)
    • 관저산 밑에 새로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마을 이름을 신기라 하고 또,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 있다고 모리이라고도 부른다.
  • ② 여름실. 하곡(夏谷)
    • 옛날 이 마을에 과일이 많아 과일이 많은 곳이라 하여 열음(果)실(谷)이 되었는데 과곡외면(果谷外面) 행정복지센터가 이곳에 있었다.
  • ③ 강성(江城)
    • 이 마을에 옛날 강씨(康氏)가 많이 살면서 세력을 떨쳐서 강성(康盛)이라 했는데 강성(江城)으로 변했다고 한다.
  • ④ 서당마. 서당촌(書堂村)
    • 강성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오봉서당(五峰書堂)이 있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양각리

1580년 선조 13년에 김해김씨 성재가 황각골에 거주하는 성씨 중 먼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고, 그 뒤를 이은 화순최씨. 성주이씨. 밀양박씨의 입주로 이웃한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한 황각. 중리. 관동. 냉수정이었는데, 1914년 양지. 지산(모산)과 통합하여 양각동이라 하였고 과곡면에 속하였다가, 1934년 석현면과 합쳐진 구성면 관내에 편입되었으며, 1971년 황각. 중리. 관동. 양지. 냉수정이 양각 1동으로 분동하고,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면소재지에서 11km 거리 북쪽 지점에 위치한 촌락으로 3번 국도에서 2km 서쪽 야산 구릉지대에 있는 황각. 관동. 중리. 냉수정 마을로 이루어지는 과수원 고장이다. 북쪽으로 고성산 지맥이 동서로 둘러 병풍처럼 성곽을 이루고, 서쪽은 양각 2리, 남쪽은 하강과 인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황각(黃角)
    • 옛날 어느 도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마을의 뒷산 산세가 와우형이라 하며 소백산맥의 황악산의 황과 우두각의 각자를 따서 이 마을이름을 황각이라고 하였던 것이 오늘의 마을 명칭이 되었다.
  • ② 관동(冠洞)
    • 이 마을은 양각동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각초등학교가 있는 부근 마을이다. 마을의 형상이 옛날 양반들이 쓴 갓모양과 같이 생겼다고 마을이름을 관동이라고 부른다. 마을 주변에는 사과나무. 자두나무의 과수원이 많은 것이 특색이며, 현재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③ 양촌(陽村). 양지마
    • 마을 뒷산의 신세가 정남향이라 지질 및 습기가 적당하여 잔디가 잘 자라고 양지바른 곳이라고 양지마. 양초이라고 부른다.
  • ④ 모산.지산(池山)
    • 마을 뒤 덕대산의 시중곡에 띠가 잘 자라겠다는 어느 도사의 말에 따라 연못의 모자를 택하고 덕대산의 산을 빌려 마을 이름을 모산이라고 불렀다. 또 옛날 마을 한복판에 연못이 있어 지산이라고도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흥평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한 평전동인데, 1914년 진흥. 외고. 내고와 통합하여 흥평동이 되고 과곡면에 속하였다가, 1934년 석현면과 합쳐진 구성면에 편입되었으며, 1971년 평정을 흥평 1동으로 분동하였고, 1988년 동을 리로 고쳤다.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한 오지 산촌으로 동북쪽으로 덕대산(811.6m)이 대항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대항면 대성, 동쪽에 황악산의 원맥인 국사봉(570m)이 솟아있고, 남쪽으로 상거리와 인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평밭. 평전(平田)
    • 김각이라는 선비가 약 280년 전에 아들 4형제를 데리고 피난을 와서 밭을 개간하고 평화롭게 생활하였다 하여 평밭. 평전이라고 부른다.
  • ② 진흥(眞興)
    • 점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신라시대 진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마을 이름을 진흥(眞興)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는 절터만이 남아 있다.
  • ③ 내고(內古). 점터. 점기
    • 옛날 이 마을에 쇠붙이를 만드는 점이 있어서 점터라 부르며 또 안쪽에 있는 오래된 마을이라고 내고라고도 부른다.
  • ④ 외고(外古). 고노실
    • 이 마을은 부락이 형성된지 오래되고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고노실. 외고라 부른다. 점터 서남쪽 골짜기에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송죽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외면에 속한 마을이 궁장. 덤밑. 연화. 고목. 백일대였는데, 1914년 대방. 송평. 죽방과 과곡내면의 내방. 광천 일부를 통합하여 송평과 송방의 한자씩을 따서 송죽동이라 하고 과곡면에 편입되었다. 1934년 석현. 과곡면을 합하여 구성면 관할이 되었고, 1971년 덤밑. 궁장. 고목. 백일대. 개정지를 송죽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3번 국도를 따라 3.5km 떨어진 감천 냇가의 도로변에 산재한 궁장. 덤밑. 개정지. 백일대 마을로 이루어진다. 동쪽은 송죽재를 넘으면 송죽 2리로 이어지고, 동남쪽은 광명리와 금평리를 접하고, 북쪽은 흥평리다. 구성중학교와 송죽휴게소가 자리하여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궁장(弓藏). 어무정
    • 옛날 장수가 활을 쏜 장소였다. 지형이 활같이 생겼다고 궁장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일면 어무정이라고도 한다.
    • 궁장 혹은 어무정이라 함을 보면 굼 - 어무의 대응이 가능하다. 여기 궁은 구무(굼)- 굼으로 터를 대일 수 있고 구무의 소리가 약해지면서 구무(굼)- 어무(엄)으로 되었고 이는 어머니 곧 물과 땅을 지모신으로 섬기던 민속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 ② 덤밑. 암하(岩下)
    • 마을 뒤에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아래 위치한 마을이라고 암하. 엄밑이라 부르다가 덤밑으로 변했다. 이 마을에 구성중학교가 있다.
  • ③ 개정지. 개정기(開井基)
    • 병자년 수해로 연화동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여 우물을 열었다는 뜻에서 개정지. 개정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 ④ 백일대. 수동(壽洞)
    •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을 때 백일홍나무가 있어서 백일대라 불리어졌고 또,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고 수동이라고도 부른다.
  • ⑤ 죽방(竹方). 댓방
    • 옛날 약 3백년 전 김의술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대나무가 많다고 댓방. 죽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 ⑥ 황새말
    • 이 마을은 송죽동의 송죽재 북쪽 아래에 위치하며 과곡초등학교 남쪽 죽방 마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학이 목을 길게 뻗어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황새 마을이라 한 것이 변음하여 오늘날 황새말로 부르게 되었다.
  • ⑦ 주막
    • 이 마을은 김천에서 경남 거창행의 과곡재 남쪽 아래 도로변에 위치하고 금평동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는 삼방통행의 교차로 상의 과곡초등학교 앞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가는 나그네와 여러 마을 사람들의 나들이 하는 데 휴식처로 알맞은 곳이라서 자연히 술 파는 집이 들어서게 되어 이 마을 이름을 주막이라고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광명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내면에 속한 기로동. 배평마을이었는데, 1914년 광천. 내방. 덕마루. 봉대를 합하여 광동명이라 하여 과곡면에 속하였다.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을 통합한 구성면 소관이 되었으며, 1971년 상기. 중기. 하기. 배평. 도현을 광명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많은 가옥이 유실되고 수십명의 인명을 잃은 마을 사람들이 도현 - 도미지에 새터를 마련, 정착하여 생긴 마을이다. 면소재지에서 동남으로 5.5km 떨어진 감천 유역에 이루어진 넓은 평야지대에 산재한 5개 마을(상리, 중말, 하촌, 도현, 배평)로 송도봉. 연암봉이 서쪽에 솟아 있고 감천이 촌전역을 안고 흐른다.

상리는 선산여씨, 중말은 고성이씨. 인천이씨. 하촌은 성산배씨. 고령신씨의 집성촌이었으나, 1936년 병자 홍수로 대부분 집을 잃고 고장을 떠났다. 기동은 조선시대 김산 5대 반촌의 하나였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기를. 기월. 기로(耆老)
    •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단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장수하기를 빌었는 데, 달고 같이 변함 없이 장수를 누리도록 마을 이름을 기를. 기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의 뒷산을 송수봉이라 부르며, 앞산의 큰 바위는 마을 사람들이 백 세까지 장수하도록 백세탑이라고 하였으며 상리 앞의 봉우리는 연만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는 3개의 부락 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에 있는 순서로 상기(上耆). 중기(中耆). 하기(下耆)로 부르고 있 다(최진동 <70> 외 5명).
  • ② 도현(挑峴). 도지미
    • 이 마을은 병자년 수해 때 기를들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살면서 생긴 마을로서, 돌아가는 고개에 위치하였다 하여 도지미. 도현이라고 부른다.
  • ③ 배평(排坪). 바랫돌. 벼루들
    • 하리 마을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서 감천이 흘러내려 오다가 굽은 지점에 침식되어 벼랑이 생겼으므로 벼루들 또는 바랫들이라고 부른다.
  • ④ 광천(光川). 빗내
    • 이 마을은 감천 냇가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을 바라보면 빛이 많이 반사된다고 마을 이름을 빗내 또는 광천이라고 부른다.
    • 빗내의 속내는 마을을 냇물이 빗겨 흐른다는 뜻으로 새기면 좋을 것이다.
  • ⑤ 덕마루. 듬말
    • 지금으로부터 수백년전 강모와 이모란 역학자가 이곳에 와서 뒷산의 형세가 기러기가 떨어져 북향으로 날아가는 모양이라서 수려한 누각이 들어설 장소라 하였으므로 덕마루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은 듬말로 불리어 온다.
  • ⑥ 내방(來方). 옴배미
    • 이 마을은 오목하고 쏙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산모퉁이를 돌아야만 마을이 보인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올빼미 눈처럼 쑥 들어 갔다고 해서 옴배미라 불렀다. 또 옛날에 과거보러 가던 한 선비가 이 마을의 친구를 만나고 나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후 다시 이곳의 친구를 예방하였다는 유래로 내방이라고 한다.
  • ⑦ 봉대(鳳台)
    • 병자년 수해로 인하여 이주된 촌락으로 마을 뒷산 모양이 대봉이 앉은 형상이라 하여 봉대라 부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금평리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진 초남단 산간오지에 위치한 금곡. 광수 마을로 동쪽으로 가제산(682.7m), 서쪽으로 송림산(560.7m)이 에워싸고, 남서쪽으로는 지례면과의 경계를 이루었고, 동쪽으로는 금평 2리다. 임진왜란과 일본의 강점기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여대로(呂大老). 여중룡(呂中龍)과 같은 선열이 나온 곳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광수(廣首). 너불머리. 넘머리
    • 마을이 병모양으로 생겨 입구가 좁다가 넓어진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너불머리. 넘머리. 광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 ② 금곡(金谷). 팥고개. 팔곡(八谷)
    • 옛날 이곳에 화전민이 입주하면서 마을이 이룩되었는데, 이 마을에서 지례현까지 여덟고개 를 넘는다고 하여 팔곡. 팔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 ③ 파실. 두곡(豆谷). 두릉
    • 옛날에 두릉이로 불러오다가 백 여년 전에 두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때 땅이 메말 라 모든 곡식이 잘 안되고 그 중 팥이 가장 잘 되었기 때문에, 약 70여년 전부터 파실로 부 르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구미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구미. 방산과 상북면에 속한 무릉리였는데, 1914년 이를 통합하여 구미리라 하고 김천군 석현면에 편입되고, 1934년 구성면 소관이 되었다. 1933년 계유년 홍수에 석현면 청사가 떠내려 갔다.

석현면과 과곡을 합하여 구성면이라 함은 지례현의 구호인 구성(龜城)을 인용한 것이다. 석현면 옛 청사는 구미리에 있었고, 조선 초기에는 지례현 청사인 동헌이 이곳에 있었다 하며, 지례현 관할 전역의 마을을 구미리라 했다 한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3번 국도변에 위치한 구미. 방산. 무릉으로 이루어진다. 감천변에 발달한 평야가 동쪽으로 펼쳐지고, 남쪽으로 무릉교가 지례면과의 경계선에 놓여 있고, 동쪽으로 감천을 건너면 미평리이다.

지명의 분포로 보면 아홉 구(九)- 계열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역리학의 영향으로도 보이나 그 기원은 거북구(龜)로 봄이 온당할 것으로 본다. 여기의 구미나 선산의 구미나 다를 바가 없다. 선산의 구미만 하더라도 자료에 따라서는 원수 구(仇)를 쓴 구미로 나옴을 보아 그런 개연성은 더 있다고 할 것이다. 거북이 아니더라도 움푹 패인 물구덩이 곧 굼뜸을 이르는 걸로 보면 좋을 것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무릉(武陵)
    • 전주인 양녕대군의 후예 이향노가 고향에 돌아와서 살았는데 그 당시 마을 주변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릉도원이라 하였다가 약칭하여 무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② 구미(九尾)
    • 옛날 이름은 구미(九美)로서 아홉 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을 말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구미(九尾)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서 구미(九美)란 배밭골. 상여바위. 복숭아나무골. 매봉. 방산. 선창. 송정. 샘골. 흔들바위를 말하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임평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상북면에 속한 임평리였는데, 1914년 탄동을 합하여 석현면에 속하였다. 1934년 석현. 과곡면을 합하여 새로 신설된 구성면 소관이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6km 지점인 572번 지방도로를 따라 들어간 산간 오지의 임바대. 탄동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암바대(임평)와 탄동은 2km의 거리로 서남쪽재를 넘으면 부항면 외포 마을이며, 남쪽으로 지례면을 통하는 재가 있고, 서북쪽은 임천리, 동남쪽으로는 구미리와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임평. 임바대. 임평리(任坪里)
    • 이곳은 예로부터 지하수가 귀하다고 하여 임바다라 했고, 다시 임바대로 변음되었으며, 지금은 탄동과 함께 임평으로 불리고 있다.
  • ② 탄동(炭洞). 숯가매실
    • 옛날 이 골에 수목이 울창하여 숯을 많이 구워 냈다 하여 숯가매실이라고 했고, 탄동이라고도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임천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상북면에 속한 산정. 단수. 장자골. 사기점인데, 1914년에 이를 임천리로 통합하여 석현면에 속하였고, 1934년 구성면 소관이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번국도 4km지점에서 572번 영동선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6km 지점인 산간 오지로 도로변에 산정. 단수. 장자골. 사기점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은 월계, 서북쪽은 마산, 동남은 임평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산정(山亭). 새터
    • 이 마을 뒷산에 정자가 세워져 옛날 임평. 임천. 월계. 마신리 4개 동민의 유흥장이라 할 수 있다. 유락을 즐기거나 주민의 잘못된 일들을 이 산정에 나와서 해결하는 곳이라서 마을이름을 산정이라고 한다.
  • ② 단수. 단계(丹溪)
    • 약 130년 전 경주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산 숲에 달빛이 어리면 그 아름다움이 절경이라 단계라 불리어 오다가 약 60여년 전에 단수라고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 ③ 장자동(長子洞), 장자울
    • 옛날 이 마을에 장자가 살고 있을 때 그 세력을 널리 떨치니 사방에서 걸인의 구걸이 끊어 지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장자울. 장자동이라고 한다.
  • ④ 사기점. 사점(砂店)
    • 조선 말엽 충북 지방에서 고령토를 가져와 질그릇과 사기그릇을 구워 내었다고 마을이름을 사점이라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월계리

조선시대에는 지례면 상북면에 속한 아래앞실. 웃앞실. 골마 북창촌. 사점이었는데 1914년 이를 통합하여 월계리리 하였다. 김천군 석현면에 편입되었으며, 1934년 구성면 관할이 되었다. 구성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4km지점, 3번국도에서 서북으로 572번 지방도로를 따라 7km지점인 산간 오지의 월평. 임규. 골마. 북동. 사점 마을로 이루어졌다. 아래앞실 뒷산에 장석광산이 있고, 도로 따라 서북쪽은 마산리, 남동쪽은 임평리와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압실. 월평(月坪). 산실
    • 이 마을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어서 압실(鴨一)이라고 불리고 있다. 압실 촌락의 주민 일부가 아랫목에 이주하게 됨에 따라 아래압실로 불리게 되고 원래 있었던 압실을 윗압실이라고 한다.
  • ② 골마. 이리골. 의리곡(義理谷)
    • 월계리 서부에 속하며 임천초등학교에서 서남쪽 1.5km 떨어진 산간마을로서 훌륭한 선비들의 의리를 잘 본받고 지켜 살아가려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의리곡이라고 한 것이 변음하여 이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또 골짝마을이라고 골마라고도 부른다.
  • ③ 사점(砂店). 사기점. 월계사점
    • 옛날 이곳에서 옹기를 만든 곳이라 하여 사점. 사기점 또는 월계에 있는 사점이라고 월계사점이라고 한다. 이 촌락은 월계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마산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상북면에 속한 마산. 사점이었는데, 1914년에 통합하여 마산리라 하였다. 이웃한 수부동. 질매재. 달암. 음지. 찬물내기 등 산재한 작은 마을이 이에 예속되어 석현면 관내로 편입되고, 1934년 구성면 소관이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13km 지점에 본동. 묵은점. 수부동. 질매재. 달암. 음지. 찬물내기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없어진 곳도 있으며, 구성면의 가장 서쪽 끝 오지로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질매재를 경계로 접하고, 동남쪽으로 572번 지방도로를 따라 임천. 월계. 임평리로 이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묵은점. 구사기점. 사점(砂店)
    • 옛날 이 마을에서 사기그릇을 구울 때에는 사점이라 하였으나 그 후 사기그릇을 굽지 않았으므로 묵은점. 구사기점이라 불렀다고 한다.
  • ② 수부동(壽富洞)
    • 마산리 중 가장 살기가 낫다고 부(富)자를 쓰고 이 마을에 약 100년전에 문광수라는 선비가 128세까지 장수하였다고 수(壽)자를 따서 마을 이름을 수부동이라 하며, 이 마을에 살면 수와 부를 함께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작내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장천, 관평이었다. 1914년 양지촌. 평지촌을 함께 통합하여 작내리라 하여 석현면에 예속시켰다가, 1934년 구성면 관내가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km지점 3번국도에서 서쪽으로 1km 들어가는 들판에 새터. 양지마. 평지마. 울안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서쪽은 용호리로 이어지고, 동쪽은 구미리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울안(墻內)
    • 옛날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의성김씨가 대가족을 이루고 한 울안에서 정착하여 살았다고 마을이름을 울안이라고 부른다.
  • ② 양지마. 양지촌(陽地村)
    • 작내리에서 중심되는 마을이며 마을의 위치가 양지바른 곳에 있다 하여 양지마. 양지촌이라고 부른다.
  • ③ 새터. 관평(觀坪)
    • 옛날 이 마을에 처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새로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고 마을이름을 새터 라고 했다. 들을 보고 모여 들어 이룬 부락이라 해서 관평이라고도 한다.
  • ④ 평지촌(平地村). 평지마
    • 마을의 지형이 평평하다고 마을 이름을 평지촌이라고 한다. 조선조에 작내역이 있었으며 위치는 작내마을 부근에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용호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복호. 와룡이었다. 1914년 각골. 신기(새터)를 통합하여 용호리라 하고 김천군 석현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구성면 관할이 되었다.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km지점인 3번국도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2km떨어진 곳에 와룡. 각골. 상복호. 하복호. 새터 마을로 이루어졌다. 동쪽은 작내, 서쪽은 임천리이며, 북쪽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상거리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복호(伏虎)
    • 마을 앞산의 산세가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상과 같다고 복호라고 이름지었으며 윗마을을 윗복호동, 아랫마을을 아랫복호동이라고 부른다.
  • ② 와룡(臥龍). 왓숫골
    • 옛날 김해김씨가 살면서 숲이 많이 우겨져 있다고 왓숫골이라고 하였다. 또, 마을 뒷산 산세가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와룡이라고 부른다.
  • ③ 각골. 각곡(各谷)
    • 옛날 이 마을에는 연안이씨들이 몇집 살아 왔으며, 마을 주변에는 많은 산이 에워싸있고,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여러 줄기의 골짜기가 있어서 각골. 각곡이라고 부른다.
  • ④ 새터. 아랫마. 신기
    • 마을의 위치가 아랫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랫마라고 부르고, 또 윗마을 보다 먼저 터를 잡았다고 새터라고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상거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복교. 저평. 명덕이었다. 1914년 대림. 나속과 김산군 대항면 백어를 통합하여 상거리라 하여 석현면에 편입되었다. 1934년 구성면 소관이 되었고, 1971년에 복교. 저평. 명덕. 나곡과 대항면에 속했던 백어동을 통합하여 상거리로 하였다.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오지에 산재한 복교. 저평. 명덕. 나곡 마을로 이루어진다. 대항 사이의 군도가 복교, 저평을 지나며, 복교에서 서편으로 갈려 들어가면 명덕과 나곡이 있다. 서쪽으로 대항면 대성리와 접하고, 북쪽으로 흥평 1리(평밭), 동쪽으로 상좌원인 면 소재지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벽계(碧溪). 복교(伏咬)
    • 공자동. 백어동 등 선비의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 이 마을로 물이 흘러 내려오므로 윗동네 선비들의 맑은 정신을 이어 받아 마을을 더욱 맑고 푸르게 하여야 한다고 벽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② 저평(沮坪). 지리대. 저력촌(猪力村)
    • 옛날 이 마을에 살았던 김녕 김씨들이 공자 제자의 한 분인 장저걸력의 이름에서 저자와 력자를 따서 저력촌이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오늘의 지리대. 저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 장저걸력이라고 함은 ≪논어≫ 에 나오는 장저걸익(長沮桀溺)을 이르는 말인데 소리가 바뀌어 굳어진 걸로 보인다.
  • ③ 명 덕(明德)
    • 이 마을은 장자동. 백어동이 이 마을 위쪽에 위치해 있어 그 마을이름이 성인들의 이름이므로 그 분들의 덕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이름을 명덕이라 불렀다.
  • ④ 백어(伯魚). 배어
    • 이 마을은 남서쪽 공자동이란 마을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 마을이다. 위쪽에 대성(大聖) 공자님의 이름을 딴 마을이 있으므로 훌륭한 선비의 학문을 이어 받고자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을 공자의 아들이름을 따서 백어라고 한 것이 변음되어 배어로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상좌원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상좌원인데 때로는 상원 또는 좌원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북면. 하북면을 통합한 석현면에 편입과 동시 상좌원과 도동(들 은들), 원앞(주막뜸)을 통합하여 하원리가 되었다.

1933년 계유년의 홍수로 구미에 있는 석현면 면청사가 떠내려 갔으므로 석현 과곡면을 합하여 지례현의 옛 이름인 구성이라 하고, 면청사를 1934년도 원앞에 신축하였다. 광복을 전후로 십여차례 마을이름 되돌리기를 호소하다가 1983년 말에 원래의 동명인 상좌원이 되었다.

구성면 행정복지센터를 비롯한 공공기관이 있는 면의 중심지이며 옛 금릉군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학자를 비롯하여 큰 인물이 배출되고, 서원. 서재. 학당이 있는 학문의 고장으로 마을 위에 굴암천석과 마을 아래 삼응대며 마을 앞 감천변에 수림이 우거져 유원지로 붐비며 옛집이 많아 고색이 창연하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원앞. 주막뜸. 주막
    • 옛날 길손들이 말을 타고 경남 거창에서 김천으로 오가는 통로이기때문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주막뜸. 주막이라 하게 되었다. 또 상좌원앞이라 원앞이라고도 한다.
  • ② 상좌원(上佐院). 마실
    • 조선시대에 상좌원이란 원집이 있었다고 마을이름이 상좌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의 상원과 하원을 옛날에는 모두 상좌원이라 칭하였다.
  • ③ 도동(道洞). 문도동. 들은들
    • 이 마을 윗동네에 공자동을 비롯하여 여러 선비들의 이름을 딴 동네가 있어서 그 분들의 말 씀을 잘듣고 도를 깨우치는 마을이라 하여 들은들. 문도동이라 칭한다. 도동서원(道洞書院)이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상원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원기-원터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기. 두릉 (마드리). 수도곡(무티실)을 합하여 상원리라 하였으며 석현면 소관으로 되었다.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을 통합한 구성면에 속하였다.

수도곡은 원래 무티실로 조선시대 이전에는 수다곡소(水多谷所)로 김산현 관내에 속했다 이말정이 한성부 명례방(필동)으로부터 1451년 (문종 원년)에 낙향하여 지품에서 거주하다가 거창 모질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지품으로 돌아와 사망하여 원기 뒷산에 묻혔다. 그의 아들 오형제가 상경하고 요직에 있다가 연안군(숙기)의 차남인 진사 이제칙이 원터에 정착한 뒤 그의 자손의 집성촌이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국도를 따라 1km 지점에 안마을이 상좌원과는 황계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 사는 사대부의 반촌이었다. 방초정. 정려각. 최씨담은 마을위상을 높이고,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며, 마을 뒤에 최근까지 백로가 서식하는 곳으로 동쪽에 감천이 흐른다. 감천을 따라 국도가 지나가며, 우측 마드리는 냉천이 유명하고 마을 입구에 수강이 라 석면에 새개 있고, 서쪽 떨어진 골짜기에 수도곡이 있으며, 감천 건너편이 바로 지품(미평 2리) 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원기(院基). 원터
    • 옛날 상좌원이란 관영 숙소가 있던 곳이라고 마을이름을 원터. 원기라고 부른다.
    • 또 이 마을 위쪽에 있던 양지뜸. 웃원터란 마을은 오늘날 원터와 한 마을이 되었다.
  • ② 두릉(杜陵). 마드리. 마무리
    • 조선시대에 관영 숙소인 상좌원이 있던 당시 길손들이 말과 노래를 놓아 먹였던 곳이라 하여 마드리라 부른다.
  • ③ 수도곡(修道谷, 水道谷). 물탕골. 물다실. 무트실. 무티실. 수도곡(水道谷)
    • 이 마을은 신라 경덕왕 때 이 지방을 수다곡소(水多谷所)라는 소(所)의 이름인데 이것이 후세에 와서 물탕골. 물다실 혹은 무트실. 무티실로 변전하였으며, 수도곡이란 이름은 고려 때 수도사란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부르게 된 것이며 또 이 절에서 불도를 닦았다고 수도곡이란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불도를 닦는 곳이란 의미의 수도곡은 대단한 의미의 비약이고 물과 관련한 무트실 혹은 물탕골이 그 기원형으로 보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미평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미평리였다. 1914년에 지품과 운동을 병합하여 미평리라 하고 석현면에 속하게 되었고, 1934년에 구성면과 관내가 되었다.

1971년 미평 1리로 분동했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송림산 아래 자리 잡은 야산 마을로, 앞으로는 감천이 흐르고 천변을 따라 3번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고, 동쪽은 송림산을 경계로 송죽과 광명, 북쪽은 상좌원과 원기. 서쪽은 구미. 지례면 교리를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① 미평(米坪)
    • 옛날 이 마을 뒷편에 덕석골. 창골이라고 하는 골이 여러개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마을은 쌀이 많이 생산되어 창고에 저장해 놓고 먹을 정도로 많이 생산되는 땅이라고 마을이름을 미평이라고 부른다.
  • ② 지품(智品)
    • 이 마을은 미평에서 볼 때 구성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이 마을에 지품천(智品川)의 현청이 있었다고 마을이름을 지품현이라고 부른다.
    • 지품(智品)이라 함은 깊다- 짚다에서 나온 형태로 골이 깊고 물웅덩이의 깊이가 깊음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보인다.
  • ③ 운동(雲洞)
    • 옛날부터 감천이 이 마을 앞들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으며 마을 앞에 큰 웅덩이가 있었다고 웅동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오늘날 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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