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지좌동

김천 시가지의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감천을 사이하고 있다. 요즘 들어 국도 길가에 아파트 밀집 지역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 나면서 준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 및 국도가 마을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동으로는 농소면 신촌 마을과 이웃하였으며, 서쪽은 감천을 사이하여 용호동 시가지와 마주 보고 있다.

남으로는 응봉이 가로 막은 산악지대이며 감천면과 조마면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있다. 북으로는 감천 냇가에 발달한 마잠들이 있으며 이곳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지좌동은 갈대. 배다리. 마잠. 새말. 매실. 병실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갈대와 마잠은 조선왕조 시대에 군대면에 속한 마좌산리(馬佐山里)였고, 새말은 고가대면에 속한 지수리 (智水里)였다. 한편 매실과 병실은 개령현 농소면의 응곡과 호동이었다.

1914년 고가대면의 지대리(智大里)와 지수리와 군내면의 마좌산리를 합하여 지좌동이라 하여 감천면에 속하게 된다. 또한 응곡과 호동을 합하여 덕곡동이라 하여 농소면에 속하게 되었다. 1938년에 이르러서 지좌동은 김천읍에 속하게 되고, 1960년에는 1동과 2동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가 1983년에 이르러서야 덕곡동과 함께 어우르면서 1동과 2동도 합하여 지좌동이란 행정동으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지좌동

본디 지좌동은 황산(黃山)주변에 이루어진 마을(마잠)과 남쪽 1km쯤 떨어진 마을(새말)로 형성되었다. 황산 남쪽 4번 국도 길가 양쪽에 길게 발달한 동네가 갈대인데 언덕 아래쪽을 너머갈대라 한다. 황산을 옛날에는 봉새 황자 황산(凰山)이라고도 적었으며 금산을 상징하는 삼산이수의 하나였다. 황산 서쪽 감천변 언덕배기에 있는 마을은 배다리, 동쪽 골짜기는 마잠이며, 북쪽에 자리한 마을은 공탈이다. 황산 북쪽 공탈마을 앞에 마잠들이 있고 새말 앞에 노평들이 있다.

지좌동 가운데 새말은 조선시대에는 고가대면(古加大面)이었고 마잠과 갈대와 배다리는 군내면이었다. 1914년에 모두를 합하여 지좌동이라 하여 감천면에 들게 하였다. 1938년에 김천읍에, 1949년에 다시 김천시 관할이 되었다. 소리의 상응함으로 보아 갈대 - 가대의 대응이 가능하다. 자연부락의 이름을 보아 갈대와 관련하는 곳이 많이 있음을 떠올리면 갈대가 마을의 특징을 드러냄에 있어 하나의 특징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연부락의 이름 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 (1) 갈대. 지대(智大)
    • 지좌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마을 북쪽에는 황산이 있고 서쪽 어귀에는 감천교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새마을로 이어지는 국도와 대구에서 김천시로 들어오는 국도가 연결되며 이 국도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갈대가 많이 있었다 하여 갈대마을이라 하며, 남쪽으로는 노평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 400여 가구에 1,600여명이 살고 있고 주로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 (2) 너머갈대
    • 갈대마을로 넘어가는 갈대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너머갈대라고 불리워졌다 한다. 이 마을 가운데로 김천에서 대구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 함께 있으며 마을 서쪽에 황산이 있고, 남쪽으로 성의상업고등학교가 있다. 현재 180여 가구로 시가지가 형성되고 농업 및 상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 (3) 배다리
    • 황산을 중심으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마을은 동쪽으로 공탈과 연결되며 서쪽으로 갈대와 이어지는 곳이다. 옛날에는 마을 앞이 모두 강으로서 배를 댄 마을이라 하여 배다리라고 불렀다. 현재 서울에서 대구로 가는 고속도로 남쪽에 바로 보이는 곳인데 모두 현대식 가옥으로 개축한 마을이다. 13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로 특산작물로 채소재배를 하고 있다.
  • (4) 공 탈
    • 마잠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큰 돛단배가 드나들어 장래에 크게 번성할 터가 되라는 뜻에서 공탈이라고 했다 한다. 마을 앞에 마잠들이 광활하게 펼쳐 있어 쌀이 많이 생산되고 포도. 복숭아. 사과 등의 과수 재배도 하는 17가구 정도의 마을이다.
  • (5) 마좌. 마잠
    • 지좌동 자연부락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마을로서 마을 한가운데 공동우물이 있으며, 마을 모양이 말굽 같은 형상이라 하여 마좌 또는 마잠이라 불렀다 한다. 이 마을 남쪽으로 김천시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국도와 철도가 있고 북쪽으로는 마잠들이 있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며, 포도. 복숭아 등 과일도 생산하는 마을로 150여 가구에 700여 명이 살고 있다. 조선말 천주교 선교사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선교했던 곳으로 그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 금릉지(金陵誌) 》에는 마좌산리(馬佐山里)라 하였으며 역리들이 살았다고 적고 있다. 이곳 역리들은 김천역(지금의 남산동)에 소속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행정상으로 김산군(김천면)에 속했었다.
  • (6) 새말. 지수(智水)
    • 갈대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이 마을은 감천면과 이어지는 지방도의 주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은 감천내를 끼고 있는 노평들이 갈대마을 남서쪽으로부터 이어지고, 마을 뒤쪽은 까치골과 연결되는 산으로 되어 있는 곳에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새마을이라 했다 하며, 110가구 정도의 규모에 주로 농사를 짓고, 양계를 하는 농가도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덕곡동

김천시 동쪽 끝에 자리한 무실. 뱅실과 근래 4번 국도 길가에 이루어진 마을이다.

세 마을의 동쪽은 농소면 월곡 3리 신촌과 이웃하고 서쪽은 마잠과, 남쪽은 낮은 산이 가로막아 감천면 금송리를 사이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넓은 마잠들을 지나 감천이 돌아든 개령면 공계리와 잇닿는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농소면이었는데, 1914년에 호동(壺洞). 응곡(應谷)을 합하여 덕곡동이라 하고 1983년에 김천시 지좌동에 속하게 되었다. 4번 국도와 904번 도로가 갈리는 곳으로 요즘 들어 집들이 빠르게 늘어나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도 무실이라 부른다.

  • (1) 무실. 응곡(應谷)
    • 조선조 광해군 때 문병주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는데, 당시 마을 뒤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나무 열매가 많다 하여 무실이라 했다고 하며, 뒷산이 풍수지리설로 매에 연관되 었다 하여 응곡이라고도 했다(문병옥 <53> 외 4명).
  • (2) 빙서리. 호동(壺洞). 덕곡(德谷)
    • 1609년 신촌 권동못 옆에 집단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외침과 도둑의 행패가 심하여 감천 냇 가의 기름진 땅으로 옮겨 큰 덕을 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덕곡이라 했다 한다.
    • 호동(壺洞. 빙서리)은 마을 형태가 입구는 좁고 마을은 넓어 마치 병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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