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남산동

고성산 기슭 언덕에 자리한 마을이다. 동쪽은 황금동 주거지역과 연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평화동, 남쪽은 고성산에 가로 막혀 있다. 북쪽은 경부선을 경계로 하여 성내동과 이웃하여 있다. 동쪽으로는 남산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고려 초기부터 이곳에 김천역이 있어 이에 따른 마을이 이루어졌다. 김산군 김천면 관할인 중동(中洞)과 하동(下洞)이 있었다. 1914년에 일본식으로 이름하여 난산마찌(南山町)라 하였는데, 1946년 우리말식으로 고쳐 남산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이곳에 금이 나는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하여 금지천(金之泉)이라 하였다. 이 샘에서 금을 캐어 나라에 바쳤으나 해마다 많은 금을 공량(貢量)으로 바치라고 하여 견디기가 어려워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묻어 없애 버렸다고 한다. 김천(金泉)은 이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고성산에 쌓았던 산성터가 있으며 고성산 봉우리에는 봉수대 자리가 있다.

관터

옥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김천역관이 있었다 하여 관터라 했다 하나, 지금은 그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시가지형성에 따라 남산동에 합병되었으며 관터라는 이름도 잘 불려지지 않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노실고개

남산동과 평화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양편에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고개 부근이 늙은 쥐가 앉아 있는 전하노서(田下老鼠)의 형국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노서고개라 했다 하며, 지금까지도 이 고개를 노실고개라 부르고 있으며 도시 형성으로 많은 건물이 들어서 옛날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명의 분포로 보아 노(논-)계열의 이름은 논밭의 논처럼 들판을 이르거나 늘어선 골을 이르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길게 늘어선 골로 봄이 좋을 듯하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중동·하동

과하주샘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은 김천역의 역졸·역리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과하주 샘물을 퍼가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요사이는 중동이란 명칭도 잘 불리어지지 않고 있다.

중동 아랫쪽(동쪽)이 하동(下洞)이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찰방골

김천초등학교 북쪽 경찰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김천역의 우두머리인 찰방(察訪)이 집무하던 곳으로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시가지 형성에 따라 찰방골이란 명칭도 사라지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척동

옛날 과하주샘 밑 남산공원 북쪽에 있었던 마을인데 지명 유래는 상고할 길이 없고,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김천시 남산동으로 합쳐지고 말았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옥터

남산동 성결교회 정문 오른쪽 낮은 곳에 역에 따른 옥사(獄舍)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명칭이 사라졌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지게동

남산 공원의 서쪽 언덕배기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화목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파는 지게꾼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하며, 옛날 나무를 지게에 져다 팔아서 연명한 가난한 마을이라 하여 지게동이라 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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