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사모바위

김천시가의 중앙에 자리한 자산의 동쪽을 일명 모암산이라고도 한다. 옛날 모암산 동남쪽 꼭대기에 사모와 흡사한 바위가 있었는데, 이것을 사모바위(冠帽岩)라 하였다.

조선조 초기 영남 사림파의 종주(宗主) 김종직(金宗直)이 이곳 배천마을에 살 때 김천은 문향(文鄕)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때 하로(賀老 : 陽川洞)에는 일시에 3판서 6좌랑이 났다 할 만큼 고관대작과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고관대작의 출입에다 김종직을 찾아오는 선비들을 뒷바라지하는 김천역의 역리들은 밤 낮없이 하루도 편히 지낼 날이 없어 괴롭기만 하였다. 이러던 중 한 역리가 꿈을 꾸니 한 도승이 나타나 "괴로워할 것 없느니라. 사모바위만 없애면 편히 지낼 수 있으리라." 하거늘, 동료들에게 꿈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그 바위를 없애자고 하여 몰래 산 아래로 굴려 떨어뜨렸다.

과연 그 이후로 이 지방에서 과거하는 사람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로 사람들은 원통히 여기고 산밑에 떨어진 사모바위를 하로마울 어귀에 옮겨 놓고, 정월이면 "하로의 옛 영화를 되찾도록 정기를 내려 주소서." 하고 동제를 지냈는데, 근래까지 동제가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지금도 사모바위에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모암산의 이적(異蹟)

김천시 모암동에 있는 모암산(帽岩山) 동쪽 산마루에 사모바위가 있었는데, 그 아래는 온통 암석으로 되어 있어 예부터 신비경(神 秘境)으로 여겨졌고, 아이 못 낳는 여자와 시집 못 가는 처녀들의 기도장이기도 했으며, 구한말까지도 목욕재계하고 동제를 지냈던 곳이다.

1921년 남산공원에 일본신사(日本神社)를 지으면서 구라나리 구 마쓰케(倉成態租. 창성태조) 란 일본인이 석재(石材)로 쓰려고 이곳의 바위를 깨뜨리다가 그날로 급사하였다. 모두가 그곳의 바위를 건드리면 해를 본다 하여 만류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려 채석을 감행하다 변을 당한 것이다. 그 전부터도 집안에서 쓰려고 그곳의 바위를 건드렸다가 작고 큰 원인 모를 병으로 여러 사람이 고생했다고 한다.

구라나리가 죽은 뒤 김천의 일본인들은 그곳에 "岩金穗明神(암금 수명신)" 이란 일본신을 모시는 작은 신사를 짓고 기원제를 지내고 한국의 신을 달랜다 하여 한국 무당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한국식 굿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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