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강필수 신당(神當)

연화리 마을에 살던 '강필수'의 신위에게 정월 초이튿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강필수는 총각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위풍이 당 당하여 거만스런 사람이 말을 타고 마을 앞을 지날 때는 강필수가 마주 쳐다보기만 하면 말이 제자리 걸음을 했다 한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에 있던 그 신당을 50년 전에 지금의 자리 로 옮겼더니 옮긴 사람의 가족이 몰살당하고, 지금도 제수로 쓰는 벼를 말릴 때는 새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그를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는데, 6.25전란에도 그의 덕분으로 이 마을에는 아무 탈이 없었다 한다.

아흔아홉 다랭이

외감리 골짜기의 한 마지기 땅이 아흔아홉 다랭이나 된다고 한다. 모를 다 심고 일어서서 삿갓을 들고 보니 삿갓 밑에 한 다랭이가 남았더라고 한다.

장군봉

외감리 동쪽에 솟은 산인데 임진란 때 나라에서 송국영 장군에게 새재를 지켜 왜병을 막으라고 보냈는데, 이곳이 문경 새재인줄 잘못 알고 왜병을 기다렸으나 오지않고 서울은 이미 함락된지라 뒤늦게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결하여 이산에 묻혀 그후부터 장군봉으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큰가례골

큰가례골은 가례 앞 한들 남쪽 끝인데 이곳에 가례마을이 있었다. 옛날 마을의 부자가 인색해서 탁발 온 중을 박대했더니 중이 도사를 시켜 마을 앞에 있는 가 마바위를 깨뜨리라고 시켰다. 석공으로 하여금 깨뜨리게 하였더니 바위 속에서 학이 날아간 후로 마을에 재앙이 끊이지 않아 지금의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임진란에 은행나무 피화(被火)

조룡 1리 섬계서원에 있는 은행나무가 임진란 때 불이 붙은 것을 호미로 긁어서 진화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천연기념물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곡사(鳳谷寺)의 터

조룡 2리에 있는 봉곡사는 원래 산너머 부항면 갯절마을에 절터를 잡고 목수일을 시작하자 까마귀가 자꾸만 자귀밥을 물고 산너머로 갔다. 그래서 따라가 보았 더니 지금의 절자리에 자귀밥을 떨구는지라 살펴보니 명당이어서 이곳으로 옮겨 봉곡사를 지었다고 한다.

관기리 앞산의 청석

대덕면 관기리 앞 화전천과 덕산천의 합류 지점에 있는 산에 옛날 서산 정씨가 묘를 쓰려고 열두 길 깊이로 땅을 팠더니 청석이 있어 이를 일으키니 학 한마리 가 날아가고, 또 한마리가 날으려 하자 급히 청석을 덮었더니 학이 다리를 다쳤다. 그 자리에 묘를 쓴 후로 그 가문에 장애인이 많이 났다 한다.

호미금계(虎尾禁鷄)

대덕면 관기 3리 홈마을(호미)은 뒷산이 풍수지리로 호랑이 형상이라 하여 호미산(虎尾山) 이다. 산 아래 마을에서 닭소리가 나면 호랑이가 새벽이 된 줄 알 고 도망가게 되어 마을 운세가 쇠퇴한다 하여 예로부터 닭을 기르지 않는다고 한다.

원가래 마을

조선시대에 중이 마을에 탁발 온 것을 욕설로 조롱하자 그 중이 이 마을의 큰 바위를 가리키며 이것을 깨뜨리면 마을에 큰 부자 와 벼슬할 인물이 많이 나올 것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석수를 불러 그 바위를 깨뜨리니 그 속에서 학이 한 마리 나와 날아갔는데, 그 후 이 마을엔 질병과 재난이 심하여 원가래 마 을은 폐동이 되고 말았다고 하며, 이 바위의 모양이 귀인이 타는 가마와 같다 하여 가마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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