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곳

정승바위

옛날 봉산면 예지 2리(內立石)에 살던 광주이씨가 한양에서 정승을 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홀로 집을 지키며 살던 김씨부인은 남편과 오래 떨어져 살았기에 몹시 그리워했다. 어느 날 찾아온 노승에게 쌀 한 말을 시주하면서 일찍 남편이 돌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묻자, 노승은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연못을 가리키며 저 연못에 소금 석섬을 뿌리고, 동네 입구에 불쑥 나온 바위를 깨뜨려 길을 넓히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부인은 노승이 시키는 대로 못에다 소금을 석섬 뿌리고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를 깨버렸다. 그때까지 수양버들이 늘어진 못에서 평화롭게 놀던 세 마리의 학이 날아서 한 마리는 봉계( 鳳溪) 쪽으로, 한 마리는 창촌 쪽으로 날아가고, 또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른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있은지 사흘 후에 남편은 시체로 돌아왔고, 그 뒤로 이 마을에는 벼슬길이 끊겼다고 한다. 반면에 학이 날아간 봉계와 창촌은 차츰 번창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인물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당시 김씨부인이 살았던 집 일대의 전답을 '이층 논, 이층 밭'이라 부르며, 학이 놀았던 못 또한 조그맣게 남아 있으며, 정승바위도 마을 어귀에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정승을 '이극돈(李克墩)'이라 하기도 하고, 그의 형 '이극배(李克培)'라 하기도 하는데, 예로부터 이 고장의 향지에는 이극배가 산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며느리부터 후손들의 묘가 이곳에 있다.

2층들

예지 2리 내립석 뒤에 있는 들인데 옛날 대사헌(大司憲) 이수공(李守恭)이 살던 곳이라 한다. 그곳에 못이 있었는데 동냥온 중에게 인색하여 못에 소금을 뿌리면 집안이 흥한다 하거늘 시키는 대로 했더니 못에서 학이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 후로 집안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다.

조신(曺伸)의 시재(詩才)

조신은 성종 때 시인으로 봉계 출신이다. 성종이 그를 불러 다섯 제목을 내어 시를 짓게 하고 또 여섯 승지를 시켜 각각 어려운 운을 내게 하여 시험하니 운에 맞추어 척척 시를 짓는지라 과연 제1인자라 칭찬했다 한다.

용화사 석불

덕천 1리 용화사에 있는 석불은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백란준이 불공을 드리던 중 우로를 막아 달라는 계시를 받아 보호각을 지었다고 한다.

영일정씨 묘터

옛날에 봉산면 예지 2리 선돌 마을에는 본관은 알 수 없으나 황씨들로 대성(大姓)을 이루고 살았고, 가까운 봉계에는 영일정씨들이 집단으로 살았다. 문관 집안인 정씨 집안과 무관 집안인 황씨들은 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대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영일정씨의 교리공 만취당(晩翠堂)의 장모가 만취당의 집에서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때를 같이하여 황씨 집안에도 초상이 났다. 당시 이곳에서 좀 떨어진 태평사(太平寺) 뒷산의 재궁(齋宮)골은 명당으로 알려져 양측에선 서로 이곳을 차지해 묘를 쓰려고 벼르던 참이라, 정씨측에서 꾀를 썼다. 새벽부터 마을 뒷산을 넘어 상여를 운구하면서 또 하나의 가짜 상여를 메고 선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황씨측에서도 출상을 하여 두 집안의 상여는 서로 앞을 가로막으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때 황씨 집안엔 천하장사인 울산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나서서 한 손으로 정씨 집안의 상여를 잡고 버티자 정씨들의 가짜 상여는 얼어 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서고 기세등등해진 황씨측의 상여는 신나게 산을 향했다. 그들이 산턱에 다다르자, 산위에서 장례를 마친 정씨들이 "달고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울산이 단숨에 산위에 올라가 장례를 마치고 세워 놓은 비석을 주먹을 내리쳤는데, 비석은 두 동강이 났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비석은 반토막만 서 있다. 그 이후 용배마을에서 고속도로를 지나 남쪽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었던 황울산이 살던 집터는 헐어 못이 되었고, 황씨들은 이 마을에는 한 집도 남김없이 망하였다 한다.

생기들의 봄무

덕천 2리 생기들은 옛날 밭이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무 특히 봄무는 맛이 좋아 황간.김산 원님의 나박김치감으로 바쳐졌다 한다.

태평재

태평 2리 재실 자리에 옛날 큰 절 태평사(太平寺)가 있었는데, 영일정씨가 절에 소가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절이 망한다고 소문을 퍼뜨리고는 하루는 밤에 도포자락에 송아지를 싸안고 절 지붕에 올려 놓았더니 송아지가 슬피 울었고, 그후 중들이 스스로 떠나서 영일정씨가 그 절을 차지하고 재실로 삼았다고 한다.

재궁골

태평 2리 태평재(太平齋)가 있는 곳인데, 옛날 단종의 비 송씨가 폐위되고 피신하면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고 전한다.

다락골(多樂谷)

광천 1리 추풍령 휴게소가 있는 곳은<정각록> 비결에서 백년 뒤에는 뭇사람이 모여 논다는 곳으로 예언하여 다락곡이라 했는데, 과연 고속도로 휴게소가 되었다 한다.

죽막(竹幕)

광천 1리 죽막은 임진왜란 때 조경 방어사와 정기룡. 장지현 등이 이곳에 진을 치고 추풍령 전투 작전을 짰던 곳이라 전해진다.

최선복의 묘

광천 1리 송라마을 가운데 있는 동산에 큰 묘가 있는데, 화순인 집현학사 최선복의 묘라 전해진다.

분통골

옛날 봉산면 봉계 일대에는 서산정씨들이 많이 살았다. 어느날 집안에 초상이 났는데, 풍수의 말이 분통골에 명당이 있다고 하며 묘를 쓸적에는 반드시 관을 11개를 묻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체를 넣은 진짜 관을 묻고 차례로 빈 관을 묻어 나가다 열 개째 관을 묻은 사람들은 한 개쯤 덜 묻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마지막 한 개를 포기한 채 봉분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도 서산정씨들은 날로 번창해져서 벼슬아치가 많이 났고, 모두 부자가 되어 잘살게 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서산정씨들의 세력이 날로 번창해지자 역적 모의라도 할까 봐 두렵게 생각하여 정씨들이 번창한 이유를 알아보도록 했다. 뒤로는 극락산과 앞으론 금오산을 끼고 자리잡은 선조의 묏자리 덕이라는 애기를 들은 왕은 당장 묘를 파도록 어명을 내렸다. 묘를 파헤쳐 관을 열어 보니 빈 관이었다. 그 다음 관이 또 나와 열어 보니 역시 빈 관이 나왔고, 또 빈 관이 무려 아홉 개가 나왔다. 관아에서 나와 묘를 파헤치던 관리들은 빈 관만 거듭 나오자 지쳐서 파기를 중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 관리가 기왕에 팠으니 꼭 한 번만 더 파 보고 또다시 빈 관이 나오면 그만 두자고 우겨서 마지막으로 삽질을 하니 또 관이 나와 뚜껑을 열어 보니 보오얀 김과 함께 학 한 마리가 날아갔다. 이렇게 되자 서선정씨들의 가문은 차츰 망하였는데, 당초에 풍수의 말 대로 관을 열한 개를 모두 묻었더라면 끝내 진짜 관은 보존되고 집안은 영광을 계속해 누렸을 것인데, 마지막 한 개를 묻지 않은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지경이라 하여 이곳을 후세 사람들은 '분통골'로 부른다. 분통골은 봉산면 인의리(仁義里) 율수재 뒷골을 일컫는다.

장자동의 쇠퇴

이 마을은 부자가 많이 살고 있어 걸인의 구걸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하루는 한 도사가 찾아와 구걸을 하니 하인이 귀찮아 거절했다. 도사가 이곳에 있는 황소고개의 맥을 끊으니 장자마을이 쇠퇴했다.

창녕조씨 김천입향조 조심(曺深)의 묘

봉산면 예지리로 속하는 외입석마을 방목산에는 창녕조씨 김천입향조인 병조참의 조심(曺深)과 서산정씨부인의 묘가 있다. 이 터는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황악산을 안산(案山)으로 샘골과 큰골을 각각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로 삼아 예부터 현침혈(絃枕穴)의 명당으로 꼽혀왔다. 이 자리는 원래 조심의 장인인 서산정씨 김천입향조 부성부원군 정윤홍(鄭允弘)의 묏자리로 잡아놓은 터로서 묘 옆에 있는 옹달샘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윤홍이 졸(卒)한 후 당대 최고의 지관을 불러 후손이 번창할 병당터로 잡아놓았는데 출상일에 상여가 묘역에 당도해보니 전날 파놓은 묘광(墓壙)에 물이 가득 찼더라는 것이다. 상주들이 크게 놀라 즉석에서 논의하기를 "아무리 명당이라고는 하나 물이 솟는 땅은 불길하니 다시 지관을 불러 살피게 하자"고 하여 다시 잡은 곳이 산 너모 분통골이다. 훗날 정윤홍의 차녀(次女)로 조심의 아내인 서산정씨부인이 남편이 졸하자 친정에 부탁하여 방치되어있던 방목산 친정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간청하여 사위인 조심의 묘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씨부인이 친정아버지의 묘터가 후손이 크게 발목할 대명당터라는 이야기를 지관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시댁인 창녕조씨 문중의 번성을 위해 밤새 묘 옆 샘골 옹달샘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날라 묘광에 물을 채워두었던 것이다. 명단의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심이 처향(妻鄕)인 봉계에 입향한 이래 창녕조씨문중에서 현인달사(賢人達士)와 고관대작을 무수히 배출하며 김천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친정아버지의 묏자리에 남편의 묘를 들인 정씨부인에 대해 세상사람들은 "출가한 여인의 몸으로서 이미 명문가로 자리매김한 친정보다는 갓 뿌리를 내리려는 시댁의 번성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밤새 물을 날랐으니 오히려 가상하다"고들 칭송했다. 또한 명당에 입향조의 묘소를 들인 덕분으로 번성하게 된 창녕조씨문중에서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해마다 서산정씨 입향조의 묘제에 참석했다하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조심은 고려 말 요동정벌군으이 좌군도통사로 출전했다가 회군한 조민수(曺敏修)장군의 동생인 밀직부사 조경수(曺敬修)의 아들로 1385년(우왕11년) 개경에서 태어났다. 훗날 이성계와의 대립으로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때 조카인 조심도 연좌되어 위해가 예상되자 처향인 김천 봉계로 낙향했던 것이다. 공은 문음(門蔭/조상의 덕으로 내려지는 벼슬)으로 관직에 나아가 무관직인 산원(散員)을 지내다 1414년(태종14년)30세를 일기로 졸했다. 서산정씨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 조승중(曺承重)은 선무랑(宣務郞), 차남 조계문(曺繼門)은 울진현령을 지냈으며 1493년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조계문의 아들로 조심의 손자가 되는 조위(曺偉)는 성종 때 도승지와 호주참판,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영남사림의 종주로 추앙받는 점필재 김종직이 조심의 손녀사위가 되는 등 성종조에 이르러 창녕조씨문중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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